"저 괜찮은 거죠"

최근 그룹 비서실에서 계열사로 전보된 K부사장은 요즘 이런 전화를 자주
받는다.

자신에게 "의지"해 왔던 여러 계열사내 후배들로부터다.

말은 점잖게 하지만 "끈"이 떨어진건 아닌지 확인해 보는 투가 역력하다.

하기야 전엔 웬만한 계열사 사장들과 맞먹던 그다.

H사의 최 과장은 요즘 일할 맛이 안난다.

차장 부장이 시비를 걸 때면 더 그렇다.

최 과장은 그룹회장실 출신.

회장실 기능이 계열사로 분산 이관되면서 H사로 옮겼다.

기획팀 과장으로 하는 일은 똑같다.

그러나 "파워"가 천지차이다.

전에는 "자료 협조"를 요청할 때도 이사들과만 통화했었다.

대기업그룹들이 잇달아 비서실 기조실 등을 없애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
이다.

힘의 공백이랄까.

"회장의 뜻"을 전하는 조직이 없어지면서 회사사회의 풍토도 달라지고
있다.

비서실에 기대 살아왔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기조실 소속이라고 힘주던 초급간부들은 새 상사들 밑에서 눈치밥을 먹는다.

사람들뿐만 아니다.

비서실에 속했던 조직도 힘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삼성그룹방송을 맡았던 삼성방송센터(SBC)가 그렇다.

제일기획으로 소속을 바꾼 후 먹고 살 일이 걱정이다.

방송물을 계열사에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1주 2~3일 내는 그룹방송이야 계열사가 안사갈 수 없다.

그러나 계열사 자체제작 방송물까지 대행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일부 계열사들이 "비싸면 절대 살 수 없다"고 버티고 있어서다.

비서실을 없애야 한다는데 대해 부정적인 시각은 많았다.

그룹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추진력을 응집할 구심점이 없어진다는 이유
에서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직장인들의 상당수가 비서실 기조실의 해체를 내심
반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비서실에 제출할 자료를 짜느라 우리 회사 계획은 항상 뒷전이었다"(H사
S부장)는 말을 들어보면 그렇다.

비서실 출신들에겐 "권력무상"의 봄이다.

< 권영설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