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택선 < 한국외국어대 교수 / 경제학 >

85년 9월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선진5개국(G5) 재무장관들은 달러강세를
시정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공동 개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이 때문에 그동안 과소평가되어있던 것으로 지목된 엔화의 환율은 그 해
8월의 달러당 2백37엔에서 2년반만에 1백20엔대까지 급락했다.

그만큼 달러의 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한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달러화의 가치하락을 누구도 미국의 외환위기라 부르지 않았다.

97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로부터 시작된 환율급등은 급기야
외환위기라는 태풍이 되어 11월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한국을 탈출하려는 외국자본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마침내 국가부도의 심각한 위기감에 휩싸이면서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위의 두가지 사례는 모두 단기간에 큰 폭의 통화가치 하락을 겪은 경우로,
발생시기나 양국 경제의 규모 등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왜 같은 환율변동이 어느 국가에는 외환위기를 초래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았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달러화 가치가 하락한다고해서 미국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거나
미국 경제가 어느 시점에 무너져 버릴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원화가치가 하락하면 전체 경제가 어려움에 빠질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원화의 가치를 더욱 하락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국제거래에 있어서 신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71년 닉슨이 금태환의 정지를 선언했던 이른바 닉슨쇼크는 국제통화체제가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레튼우즈체제로 일컬어지는 고정환율제가 무너진 것도 바로 신뢰의
문제였다.

브레튼우즈체제는 미국의 달러화를 금에 연계시키는 대신 다른 모든
국가들의 통화를 달러화에 연계시키는 금.달러본위제였다.

국제거래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달러화가 필요했고 미국은 달러의 공급을
늘렸지만 달러의 공급이 늘면서 달러화에 대한 국제적 신뢰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달러화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의심받게 되자 각국은 보유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고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동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지만 원칙을 등한시하고 내실을
다져오지 못했다.

정부는 규제로 일관했고, 금융과 기업활동은 시장원리보다는 정치적 바람과
특혜에 좌우되었다.

성장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이 시장의
원리에 의해 조정됨으로써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다는 원칙을
받아들일 여유를 갖지 못했다.

대기업은 부도가 나도 망하지 않았고, 천문학적 부실채권을 가진
금융기관도 쉽사리 문을 닫을 것 같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우리경제를 보면 어느 것 하나 예측가능한 것이 없다.

예측가능성을 잃으면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가격기구는 시장상황에 대한 신호(signaling)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경제학원론 첫장에 나오는 가격기구의 신호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신뢰의
구축에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