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를 죽인 건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반란군 조사의였다"

최근 출간된 최범서(58)씨의 실록역사소설 "용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전3권 동방미디어)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야사 위주의 역사소설과 달리 정사를 바탕으로 쓴 실록소설.

태종 이방원의 어린 시절등 흥미있는 얘기를 많이 담고 있다.

특히 일반에 통상적으로 알려져있는 얘기를 뒤집는 내용이 적지않게
포함돼있어 관심을 끈다.

대표적인 것이 "함흥차사"의 유래.

최근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함흥에 파견된 차사들이 이성계측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작가는 "이성계가 차사를 죽였다는 내용이 실록에 없다"고 강조한다.

야사집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내용을 박종화의 "세종대왕"이 이어받고
사극도 이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마치 정사처럼 인식돼왔다는 것이다.

작가가 그린 당시 정황을 보자.

골육상쟁으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함흥으로
박순을 보낸다.

박순은 어미소와 송아지를 끌고 가,부자간의 정리를 일깨우고 돌아오다
그만 목숨을 잃는다.

태종은 계속 문안사와 사절을 보내지만 그들도 모두 돌아오지 못한다.

태조를 등에 업고 패륜아 이방원을 제거한 뒤 권력을 잡으려는 조사의측의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문안사를 보내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던 이성계는 뒤늦게
조사의에게 이용당한 것을 깨닫는다.

태조가 환궁하고 조사의의 난은 평정됐지만, 이 과정에서 애꿎은 차사들만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작가는 "서울시스템의 "국역 조선왕조실록CD롬"을 토대로 객관적인 고증을
거쳐 당시 상황을 그렸다"며 "흥미위주의 드라마는 재미만큼 독소도
큰 법"이라고 꼬집었다.

"용의 눈물"에서 극적 효과를 노려 조사의의 난에 태조를 끌어들이고
여진.명나라 개입을 삽화로 엮어 넣은 것도 역사를 왜곡시킨 것이라는
지적이다.

태조가 돌아온 뒤,방원은 왕권강화를 위해 본격적인 철권정치를 편다.

백성의 안위보다 왕권수호에 더 집착하는 방원.

카리스마적인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무관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게 반드시 문인이
되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소년 방원은 원주 치악산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 석휴,
신조스님 아래서 학문을 익힌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방원은 무관을 꿈꿨다.

15세에 소과에 합격하고 이듬해 대과에 급제한 뒤에도 그는 활쏘기를
즐겼다.

고려조정의 중신들을 만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발견하고부터는 더욱
문약을 경계했다.

그에게는 "글"보다 "칼"을 앞세운 통치방식이 더 유혹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평생을 권력에 집착한 그도 죽음 앞에서는 자신을 돌아본다.

그가 56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며 남긴 말은 "부끄럽다"는
한마디였다고 저자는 전한다.

< 고두현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