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철 < 하나은행 회장 >

기업의 구조조정과 부실 정리가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여기에 필요한 조치들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경제환경의 변화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기업주나 경영자가 더러
있을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롭게 전개되는 경영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다한 외부차입으로 방만하게 팽창된 기업규모를
그대로 끌고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구조 조정이나 부실 정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손실과 비용이
계속 늘어만 간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그 촉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기업을 처분하고 재산을 팔려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자본이 투입돼 재무구조를 재구축할 수 있고 내놓은 기업이나
부동산 등 재산이 팔려 나가지 않고서는 효과적인 구조조정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여건에 비추어 볼 때 국내에서는 그러한 원매자나
투자자를 구할 수 없다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외국자본을 유치해 이를 타개할 수밖에 없는데 이 부문에서도 큰 진전이
없다.

따라서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부실 정리에 가장 시급한 일은 외자유입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하루속히 제거, 적극적인 유치를 서두르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급할 때 획기적인 대책을 발표해 놓고서는 정작 구체적인
조치에 이르러서는 항상 기대에 미치지 못해 외국투자자들의 많은 불평을
들어 왔다.

이제까지 외자 유입을 위한 정부의 대응도 산업과 시장의 개방이라는
피동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잘 알지 못하는 한국시장에 자본을 투자하는 외국투자자들의 불안과 우려를
불식시켜 안심하고 투자할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이 사실이다.

법체계가 복잡하여 관련기관이 너무 많고 규정 내용들이 투명하지 못해
기관과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 행정절차가 까다로우며 오랜 시일을
요하고 있다.

원칙규제 예외인정이라는 법제 때문에 모든 일을 소관기관의 해석에 따라야
하므로 불공평하고 불투명한 점이 많았다.

여기에다 국제관행에 비추어 이행할 수 없는 억지라든가 근로자들의
단체행동과 같은 우리의 문화적 장벽은 외국투자가들의 외면을 살만했다.

이런 제도와 관행 그리고 태도로서 효과적인 외자 유인책을 마련해보았자
그 실효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외자 유입은 단순한 외국자본의 경영 지배와 시장 참여라는 소극적인
역할뿐 아니라 자본과 함께 선진기술과 경영기법이 들어와 산업 수준과
경쟁력을 촉진시키고 근로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경제의
장기적 발전에 기여하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의 산업부문 직접투자는 당면한 외채문제를 안정적으로 해소하는
길이 되고 자본시장에 들어오는 외자와 수급면에서 중화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따라서 제도를 만들고 편의를 제공한다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를
유치하고 촉진시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다기화돼있는 현제도를 그대로 두고 이 바탕 위에서 외자도입의 걸림돌을
제거한다는 것은 기관이기주의의 벽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당면문제를 종합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해결하는 길은 이
부문만이라도 네거티브 시스템(원칙 허용 예외 금지)을 채택해 단일화된
촉진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외자의 직접투자는 일반법에 우선하는 특별법에 의하여 꼭 금지할 사항만
투명하게 정해 규제하고 다른 모든 관련법의 제약은 기존법에 우선해
자유화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신규투자에 대해 우대 제도를 적용시키는 적극성도
보여야 한다.

구체적인 외자도입 관련사무를 담당하는 기관도 이 법에 의하여 단일화하고
여기에서 외자 유치를 체계적으로 전개해 성공을 거둔 싱가포르 경제개발처
(EDB)와 같은 역할도 행하게 하여 외자에 대한 홍보 유치 절차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체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조직과 인사도 경험이 많고 전문성 있는 사람들을 집중 배치해 민간기업의
마케팅전담기구처럼 운영되도록 신축성을 갖게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현실성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면서 한편으로 금융기관
건전성강화를 제도화해 구조조정작업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개별기업의 경쟁력과 수익성을 바탕으로 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신속히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구조조정을 할수 있도록 그 방향과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시장기구를 활용한 이런 작업은 금융기관의 몫일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당국이 먼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확보하도록 대출 자산의 객관적
분류기준을 명확히하고 그 위험도에 따른 충당금 적립을 철저히 이행토록
하여 그 내용을 투명하게 공시함으로써 금융기관이 스스로 부실기업 정리와
이를 통한 구조조정을 능동적으로 서두르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동시에 금융구조 개선을 촉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과 부실 정리가 늦어짐으로써 발생하는 비용과 부담은
결국 금융기관의 부실 증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싫든 좋든 거래기업의 사업성을 바탕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은
일시적 연명보다 과감하고 신속하게 정리함으로써 기회비용을 줄여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상호지급보증이 대출 관행이 돼있던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경우 금융기관이
채권자로서 권리에만 안주한다든가, 서로의 잇속만 챙기게 돼서는 그 존립
기반인 기업의 붕괴로 보다 큰 손실을 자초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승적 안목으로 채무자인 기업의 입장과 논리를 수용하여 어떻게하면
건전 기업을 살리고 비용과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구조조정과 부실 정리를
이끌어낼 것인가를 같이 연구하고 협력하는 현명함을 보여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