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11일 여권의 "정경분리"요구를 전격 수용한 것은 중진들의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초.재선의원들의 강공드라이브 기세에 눌려 언행을 자제해오던 중진들이
조심스레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주말부터.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여론의 비판이 한나라당에 집중되자 그
타개책으로 정치현안과 민생을 분리해야 한다는 기류가 중진들 사이에 확산
됐던 것.
이같은 분위기를 토대로 강경 당론을 수정하는데는 이상득 총무와 나오연
정책조정실장이 앞장섰다.
이총무는 지난 9일 여야 총무회담이 결렬되자 여당측에 냉각기를 갖자고
제의한뒤 중진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했다.
이총무는 이 자리에서 "정경분리 원칙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옷을 벗겠다"
는 배수진의 각오를 피력하기도 했다.
서청원 사무총장도 이총무를 거들었다.
이총무는 10일 낮 최병렬 박희태 김중위 이부영 김덕 의원과 점심을 같이
하면서 자신의 이같은 입장을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날 오후엔 총리서리 위헌문제 공청회장에서 김덕룡 의원을, 저녁엔
경북출신 의원 13명을 만나 "궤도선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나오연 정책조정실장은 조순 총재를 만나 "결심"을
촉구했다.
나실장은 특히 조총재에게 영문기사 스크랩 하나를 건네주며 총리서리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맡기고 추경예산안을 비롯한 민생챙기기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이 스크랩은 마틴 펠드스타인 미국하버드대 교수가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지 3.4월호에 기고한 "국제통화기금 재조명(Refocusing The IMF)"
이란 제목의 글.
IMF가 구제금융을 주는 것은 좋으나 수혜국이 처한 특수상황을 고려치
않고 고금리정책유지 등 동일한 잣대로 지나치게 정책간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게 그 골자다.
나실장은 국회에 들어가 민생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되 기업의 사활이
걸린 고금리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는데 당력을 쏟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에 조총재는 이한동 대표 등과의 협의를 거쳐 11일 오전 정경분리 수용
입장을 내놓았다.
<김삼규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