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교차로는 대부분 신호등이 없는 회전방식(round-about)이다.

80년대 초반, 영국에 처음 발령을 받고 6개월 동안은 신호등 없는 교차로가
매우 불편하고 때로는 불만스럽게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지면서, 우선 신호대기로 인한 시간 손실이 없고, 먼저
진입한 차가 먼저 빠져 나가되 우측에 다른 차가 있으면 무조건 양보하는
방식으로 빠른 차량 흐름과 아울러 교통사고도 거의 없는 이 시스템의
여러가지 장점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도 회전 방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교통량의 급증으로 대부분
신호등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는데, 영국에서는 그대로 존속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변화를 싫어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속성을 지닌 영국인들의 사고
방식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제도를 만들때부터 입체적인
시각과 다면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아무리 교통이 혼잡한 상황
에서도 철저한 준법정신과 양보심을 통해 제도 본래의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이야말로 보수와 개혁이 잘 조화되고 공존하는 나라이다.

군주제와 귀족제도 같은 전통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가 하면, 개혁이
필요할 때는 과감히 해치우는 일면이 있다.

널리 알려진 예로 1986년에는 이른바 빅뱅(Big Bang)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효율적인 금융시장을 마련했고, 최근들어서는 장기간 침체에
빠진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국을 외국자본의 투자 천국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제도 하나를 만들더라도 입체적인 시각에서 신중히 살펴본 후
지혜를 모아 결정하고, 일단 만들어진 제도는 장점을 살려 최대한 보존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개혁이 필요할 땐 과감히 개혁하는 영국인의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