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서울대 교수/시인>

매화 옛 등걸에 봄빛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렴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평양 기생으로만 알려진 작가미상의 이 작품처럼 봄빛이 돌아온 듯도 한데,
제주도에서 벌써 매화가 피었다는 화면보도에도 아직은 추운 겨울끝이다.

그러나 예부터 음력설이 지나면 바로 입춘으로 이어져, 서둘러 봄이라고들
했다.

아니 봄을 기다리던 마음이 봄을 느끼고 싶어서, 햇발도 새끼 손가락
한마디 만큼은 길어진다고 했으리.

설 지나면 김장김치는 제맛을 잃는다 하여 봄동이라는 풋것으로 봄기운을
느꼈고, 더구나 동치미는 설 지나면 먹지 않고, 나박김치를 담가 봄맛으로
봄기분 봄기운을 내고싶었으리.

아무튼 계절에도 경제에도 생활전반에 어서 봄이 왔으면.

사라져가는 풍속으로 입춘전후로 집집이 대문이나 중문 안문 또는 벽과
기둥에 옛 춘첩자를 떼어내고 새것을 써 붙여, 새봄을 맞고 또 창조했다.

즉 한해의 안녕과 대길을 기원하는 소망의 춘첩자는 대개 글공부하는
학동인 손자의 글씨였으며, 그 내용도 외성인 문장자(성인을 두려워 하고
어른들의 말씀에 경청한다)등 교육적이었다.

조부는 학동인 손자의 글공부가 지난해보다 얼마나 향상되었나 가늠하고
싶어 춘첩자를 쓰게 했다.

얼른 쓰고 나가 놀고싶어 조급하게 지필묵채비하는 손자에게 "새 힘으로
먹을 갈고 쇠 힘으로 써야 하느니"라는 글씨쓰기의 원칙과 정도도 환기시켜
가며 친히 쓰기도 하지만, 대개는 손자를 시키고는 손님들에게 손자의
글공부를 자랑하는 증거로 삼기도 했다.

춘첩자는 흔히 입춘대길에 건양다경 국태민안 시화연풍을 짝짓거나,
삼양태회 등으로 하고, 사랑채 중문에는 이문회우 고객만당으로, 안채에는
화기만당 상운서일 자모강녕 화풍감우, 부엌문에는 식수불갈, 고방문에는
주유진진 등의 축원글귀를 써붙여, 시절에 맞춰 가족의 의지와 생활자세를
새롭게 했다.

이런 준비로 봄은 한결 일찍 집안가득 찾아든 듯 어느 문을 여닫더라도
축복의 기운이 감돌아, 겨우내 웅크렸던 마음이 적극 대담하고 기운찰수
있었다.

농경시대의 풍속이나, 정보산업사회라 해서 버려야 할 풍속도 아닐 것이다.

시대와 시속이 아무리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

농산물 대신 쇠붙이를 음식으로 안 먹고, 아무리 성급해도 계절은 순서를
건너뛰지 않듯이, 금년봄은 그 어느 해보다 우리에겐 심각한 의미가 된다.

혹한 날씨보다 더 혹독한 IMF습격에, 유행속어대로 "아이고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이때껏 우리가 피땀흘려 이룩한 자존심에 대한 허무허탈, 어이없는 분노,
실로 기가 차는 치욕과 위기가 아닌가.

그래서 그간 원칙도 정도도 무시하고 살아온 생활을 반성하고, 다시 새로운
각오로 원칙과 정도만을 따라 제대로 살면서 우리의 새봄을 재창조해야 할
중대시점에 서 있다.

어쩌면 아파트 현관문에다 초등학동의 서투른 붓글씨로 "근면 절제",
"원칙대로 정도대로", "친절하고 따뜻하게"등의 이 시대에 맞는 춘첩자를
써붙여보는 것도, 썩 괜찮은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는? 보릿고개"라는 수수께끼가 있던
시대의 우리 모습을 재생하는 TV드라마도, 풍요시대에 크는 세대를 교육하고
싶어하는것 같다.

생각하면 추억이란 마력으로 그립기만 한 얘기는 아니다.

얼음구멍에 빨래하러 나가보면, 어느 돌틈을 비집고 불미나리 새파란
싹과 눈길이 마주쳐, 저 여린 생명도 저 얼음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봄을
알리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승냥이 울음소리로 찬 바람이 질주하는 들판과 야산 논밭두렁에서 파랗게
돋는 것이면 다 뜯어 먹다보면 넘게 되곤 하던 보릿고개, 그렇게 무자비하게
그 어린 풋나물 순을 사람과 짐승이 모조리 다 뜯어먹어도, 줄기차게도 풀은
돋아 무성하게 자라 꽃피우고 씨앗 영그는 가을을 맞이하느니.

초목이든 사람이든 목숨가진 것이 사는 길과 법칙을, 이 모두를 고루
키우는 하늘의 공평한 섭리까지도 깨달아 신뢰하고 따라오곤 했었으니.

자연적 자연과 가깝게 살았더면, 우리는 훨씬 더 성숙한 인격을 지녔을
텐데.

이른 봄 차가운 바람이 귀때기를 이리 치고 저리 갈겨대는 언덕에 누워,
망망 호호한 하늘을 향해 원망하다가도, 많은 몫은 하늘에 맡기고 성실과
부지런을 다할 뿐인 봄눈 트는 나뭇가지를 볼줄 알았더라면, 아니 마당귀에다
강냉이 한포기라도 심어 그 성장과정이 원칙과 정도를 미련하게도 어김없이
따라야 함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때껏 무원칙으로 정도를 무시하고
살아오진 않았을듯.

권력에 아부하느라고 만불에도 턱걸이하면서 이만불 시대가 내일인 듯이
부추기며, 그 공로를 오로지 하려 인기영합에 춤추던 그 짓거리나,
어리석게도 철석같이 이 허세만 믿고, 흥청망청 물쓰듯 유람다니며 남의
나라 남의 문화를 무시해온 나머지, 돈꾸러 세계를 길이 가로 뛰어다니는
국제적 치욕을 겪게 되다니.

채널만 돌리면서 휴일하루를 허비했고, 날마다 감각적 재미에 홀린채
한해가 후딱 지나가는 이 시대를 살아오며, 정도와 원칙만이 생존법칙인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약삭빠르고 야비하게 제멋대로가 더 잘되는 듯,
정도와 원칙은 따를수록 손해본다고 믿어오진 않았을까.

쇠힘을 발휘하여 힘찬 글씨를 쓰는 원칙은, 참새의 힘으로 먹을 갈아야
하는 지루한 인내의 정도를 따라야 하듯이.

서예에 대한 추사선생의 말씀대로 한 가지만 남은 소나무처럼 고독한
자세로 춘첩자를 써 보면서 정도와 원칙의 중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으면.

이 위기의 체험이 제발 우리를 번쩍 정신나게 철들게 하기를 바라며
공무사무 어디에도 원칙과 정도만이, 성급하여 인내와 절제를 마다하는
우리병에 좋은 처방약으로 증명되어 주었으면.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