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구조조정은 기업 자율에 맡긴다"

말도 많은 대기업그룹의 대규모 사업교환, 소위 "빅딜"에 대한 차기정권의
공식입장이다.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오가던 혼란스런 모습이 정리돼 다행이다.

그러나 재계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비록 공식발표는 아니었더라도 신정권의 정책주도그룹이 "기업간 빅딜이
과감히 일어나야 한다" "시간이 없다" "국민이 감동할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아끼는 기업이라도 내놓아야 한다"는 등등의 발언이 잇달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때문에 "공식요구한 적이 없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에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인 것같다.

그룹간 대형사업 교환이라는 이른바 "빅딜"은 대기업들끼리 경쟁력있는
사업을 한 곳에 집중시키자는 것이다.

그룹별 업종전문화를 통해 한정된 경영역량을 여러분야에 분산시킬게
아니라 주력 핵심업종부문으로 집중시켜 국제경쟁력을 갖춘 세계적 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 의도하는 바다.

사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방만한 투자와 문어발식 기업확장의 병폐는
어느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정책의 잘못이든 기업인의 책임이든 현실적으로 과잉중복투자도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빅딜의 필요성과 기본방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리가 요란했던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두된 "재벌 길들이기"의 정치적 행사이거나 아니면 정부에
의한 인위적 대기업 개편의 시도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 탓이다.

정부기능은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되는데 필요한 경기규칙을 만들고 이를
어기지않도록 감시하는데 그쳐야 한다.

빅딜이 꼭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지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해법일 것이다.

새정부의 정책골격을 만들고 있는 비상경제대책위는 이미 기업구조조정
촉진을 위한 각종 법률개정안을 마련해 이번 임시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상호 빚보증을 조기에 해소하고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토록 의무화시키는가
하면 지배주주의 경영책임 강화와 소액주주의 감시기능을 강화키로 했다.

여기에 금융기능이 정상화되고 내부거래를 차단시키는 등 경영투명성
확보를 위한 장치가 마련된다면 구조조정을 빨리 추진하기 위해 몸달아야
할 쪽은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기업일 것이다.

빅딜구상은 개념적으로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실행과정은 여간 복잡하지않고 현실적으로 쉽게 매듭짓기 어려운
과제다.

준비없는 빅딜은 가뜩이나 어려운 산업현장의 고통을 키우고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

또 빅딜을 통한 업종전문화 시책자체가 꼭 바람직한 것인가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위업종을 그룹별로 전문화시키자는 얘기는 분야별로 독과점적 지위를
부여하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경쟁이 줄어들면 기업의 경쟁력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향평준화될
우려가 있다.

또 기업의 대형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업환경은 정보화의 진전으로 대형화 메리트가 급속히
줄고 있는 추세다.

빅딜이 시대조류에 역행하는 측면은 없는지 한번쯤은 따져보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새정부 경제정책의 새로운
기본틀로 제시했다.

지난해 3월 출간된 그의 저서 "김대중의 21세기 시민경제이야기"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경제영역에서 군사문화적인 관치경제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고 민주주의
원리와 원칙에 입각한 경제제도와 관행을 정착시켜 진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민주적 시장경제에선 권력의 분산을 통한 분권화, 법치주의, 시민의
자율성 보장과 참여확대를 기초로하여 사유재산권, 계약의 자유, 그리고
자기책임 원칙이 유기적으로 관철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아가 복잡한 경제과정이 가격기구에 의해 원활히 제어될 수 있도록
화폐가치의 안정성과 경쟁질서 실현을 위한 대내외 시장의 개방이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경제정책의 항상성이 견지되어야 한다"

매우 어렵고 복잡하다.

그러나 경제운영에 정치적 민주주의의의 원리원칙을 적용하자는 것이고
"권위주의적 관치경제"를 청산하겠다는 의미로 요약된다.

새삼스레 "민주적 시장경제"의 정의를 규명해본 것은 요즈음 최대관심사로
돼있는 대기업그룹의 구조조정추진이 그러한 차기정부의 새 경제패러다임과
상충되는게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6일로 예정된 김당선자와 30대그룹기업총수들과의 회동에서 그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있을 것같다.

그런 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끈다.

문어발식 몸집불리기, 과도한 차입의존경영, 정경유착 등 그동안 제기된
소위 재벌의 존재양식과 경영구조에 대한 반성과 개혁은 이 싯점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어서도 안되고 자기가 아끼는
기업을 내놓아야 하는 그런 감성적 잣대가 적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김당선자의 경제이념인 "민주적 시장경제"의 원칙하에서
당면한 위기극복의 수단이어야 하고, 그 방법 또한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