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채권은행단과의 외채 협상을 극적으로 마무리지은 28일 저녁(현지
시간), 실무 협상단장을 맡았던 정덕구 재경원 제2차관보는 뉴욕 특파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협상 과정을 "백마고지 전투"와 비교했다.

6.25동란 당시 백마고지를 놓고 적군과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벌였던
상황과 이번 협상 과정이 닮은 꼴이었다는 술회다.

특히 연장되는 외채에 적용할 금리에 대한 공방전이 치열했다고 한다.

협상 대상 단기 외채가 2백40억달러에 달한 만큼, 이자율을 1bp(0.01%)만
낮춰도 연간 2백40만달러(37억8천만원)의 금리부담을 절감할 수 있는
판이니 그럴만도 했다.

협상단은 이렇게 치열했던 "전투"의 결과에 대해 만족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하기야 서방 채권은행단이 현재 한국이 국제자금시장에서 돈을 조달하는데
들어가는 "마켓 레이트"가 10% 안팎인 점을 들어 "두자릿수 금리"를 고집
했던 것에 비하면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전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결과"임에도 결코 웃을 수 없는게 우리의 냉엄한
현실이다.

은행들이 외채를 유지하는데 들어가게 된 평균이자 8.1%에다, 정부가
"엄정하게" 부과하기로 한 지급보증 수수료까지 합치면 은행들의 자금조달
원가는 연 9%에 육박할게 분명하다.

결국 은행들로부터 돈을 꾸어야 하는 국내 기업들의 자금조달 코스트가
그만큼 치솟을 것이 불문가지다.

이 정도만 아니다.

이번 협상의 타결로 은행들은 일단 한 숨을 돌리게 됐지만, 은행들 못지않게
많은 단기 외채를 안고 있는 기업들은 "만기 연장"이나 "정부 지급보증"의
협상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소외돼 있다.

한 미국계 대형 은행의 코리아 데스크(한국대출 책임자)는 "한국 기업들에
대해서는 대출금을 회수하고,전체 대출한도(크레딧 라인)를 줄여 나갈 방침"
이라며 "앞으로 기업들 사이에 대란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기업들이 "방만한 투자를 일삼아 온 재벌이야 말로 오늘날 한국
경제를 이 꼴로 만든 주범"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주눅들어 있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외환 공황"이 몰려드는 모습은 상상하기 조차 끔찍하다.

"기업을 다 죽이고 난 뒤에 은행들만 살려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이냐"는
미국 은행 코리아 데스크의 "충고"는, 정부와 금융계가 "백마고지 전투"의
결과에 마냥 취해 있을 때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이학영 < 뉴욕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