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찾아라.

다만 그에 따른 위험요인도 충분히 분석하라"

5대그룹에 속한 모그룹 총수가 지난 10일 기조실에 긴급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기조실 직원들은 그동안 추진해온 구조조정작업에 더해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느라 대부분 회사에서 휴일을 보냈다.

갑작스레 이뤄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과 5대그룹회장간의 13일 조찬회동을
앞두고 재계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당선자가 직접 대기업그룹 총수들을 만남에 따라 이번 주내에
새정부의 대기업정책과 그에 따른 재계의 역할에 가닥이 잡힐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당선자와의 회동뿐 아니다.

13일 오후에는 경제5단체장이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총재와 만나고
15일에는 전경련회장단회의가 열린다.

재계로서도 "반드시 해야할 일"을 발견해내고 그에 대한 실천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 셈이다.

그러면 재계가 지금 "내놓아야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당초 박태준 자민련총재의 10대그룹회장 연쇄회동으로 예정됐던 것이
대통령주재 5대그룹 간담회로 바뀐 만큼 재계가 준비해야할 "보따리"는
훨씬 크고 내용도 다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재계의 "믿음직한" 카드를 기대하고 있는 캉드쉬 IMF총재를
의식해서도 그렇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대통령당선자가 이례적으로 취임전에 5대그룹
총수를 "부른"만큼 상당한 정도의 개혁요구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IMF와의 합의대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반드시 만들어야
하고 가능하면 15~17일 임시국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즉 정리해고법 처리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는 노동계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달래주기 위해 김당선자가 재계에 "일정한 역할"을 주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계가 준비해야 할 카드는 정리해고의 조기통과를 위한 재계의
지원사격이 될 수 밖에 없다.

모그룹 관계자는 "정리해고법이 통과되더라도 이를 무차별 해고의 수단으로
악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일단 경기가 회복되면 제일 먼저 정리해고됐던
근로자를 채용하겠다는 식의 약속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노동계가 주장하고 있는 "고통전담 불가론"을 불식시킬 수 있는
일정 정도의 고통분담책도 제시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계열사 수가 줄어들고 매출이나 이익규모가 큰 폭으로 감소되는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상호지급보증해소 <>결합재무제표작성 등 대기업정책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선언이 그 한 예이다.

IMF가 문제삼고 있는 경영투명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기조실이나 비서실
등 조직을 줄여나가고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일정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캉드쉬 IMF총재를 만나는 일정이 잡힌 만큼 민간부문에서의 IMF 합의존중
의지도 천명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구조조정특별법 제정을 전제로 그동안 다소 미진했던 한계사업정리와
부실계열사매각 등을 가속화하겠다는 약속도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 이외에도 김대통령당선자가
요구하면 즉시 풀어놓을 보따리도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

내용은 <>고통분담 차원의 5년간 무배당 선언 <>사재출연을 통한
실업안정기금 설립 등이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위기극복을 위한 방법론은 현장에서 느끼는 시각차를 분명하게
전달한다는 것이 총수들의 입장이다.

모그룹 관계자는 "시장경제를 잘 운용하지 못해 위기가 초래된 만큼
해결방식은 철저히 시장경제주의를 따져가며 찾아야 한다"고 전제,
"구조조정이 급하긴 하지만 시기와 수위를 정부나 IMF가 인위적으로
강제해선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경련 관계자도 IMF의 합의보다 앞당겨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충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수출입 마비라는 부작용을 낳았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경제혈관을 막아버릴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정책운용의 탄력성만 보장된다면 재계는 IMF조기극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에 관한한 무엇이든지 다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셈이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