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로에 선 ''주재원산업'' - 미국 ]]]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미국 대도시의 교민 사회에 요즘 파산
신청자가 줄을 잇고 있다.

미국 동부 한인 밀집지역인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법원.

이곳에는 지난 12월이후 1주일에 두세명꼴로 한인 자영업자들의 파산
신고서가 제출되고 있다.

담당 직원은 "전에는 많아야 한달에 서너명 뿐이었다"며 고개를 갸우뚱
한다.

파산을 신청하는 교민들의 업종은 대개 몇가지로 한정돼 있다.

옷가게 비디오대여점 요식업소 이발소 미장원 여행사 생선가게 야채상 등.

이 중 옷가게와 야채상들은 지난해 연방 웰페어(생활보조)축소조치 이후
주고객층인 흑인-히스패닉계 등 소수민족들의 구매력 감소로 영업에 타격을
입게 된 경우.

나머지 업종은 본국 지.상사의 주재원과 그 가족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온 이른바 "주재원 산업"이다.

주재원들이 몰려 살아온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시에서 이발소를 경영
하고 있는 K씨(47)도 "사업정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7평 남짓한 공간을 월 1천달러에 세내 영업하고 있는 그의 단골 고객은
인근 주택가의 종합상사 은행 증권회사 등 한국계 기업의 주재원 열명 남짓
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6명이 최근 전격 귀국해버렸다.

후임자는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뜨내기 손님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월세 내기도
어렵게 됐다는 푸념이다.

이렇게 사정이 심상치 않아지면서 "한국 것"만을 팔던 식당이나 비디오
대여점들의 구색이 갑자기 "국제화"되기 시작한 것도 IMF시대 이후 달라진
풍속도의 하나다.

식당들은 일본인 등 다른 민족들을 겨냥해 스시 등 일식 메뉴를 추가하고
있고, 비디오대여점들은 한국 TV의 드라마 외에 미국 일본 등의 비디오도
갖다놓는 등 "살아남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주재원들을 상대로 영업해 온 한국계 중고차 딜러와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실속없이 바빠진 경우에 해당한다.

매물은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원매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제일-외환 등 대형 시중은행과 몇몇 증권회사들이 전격적으로
지점 폐쇄를 결정함에 따라 "이제까지"보다 "지금부터"가 더 걱정이라는
분위기다.

어두운 곳이 있으면 밝은 족도 있는 법.

"IMF 특수"를 누리는 곳들도 있다.

대표적인 게 한인 하숙업자들이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조지 워싱턴 브릿지주변 한인타운인 포트리 일대에
늘어서 있는 하숙업자들은 "방"을 구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빠듯해진 주재경비 탓에 가족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하숙 생활을 시작
하는 주재원들에다가 철수하는 주재원 부모들과 떨어져 "나홀로 유학"을
하게 된 고교-대학생들까지 어우어져 하숙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

미증유의 금융위기로 쪼그라들고 있는 한국 경제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슬픈 풍경들이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