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52) 단계 하위지 <8.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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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3년(1455) 윤 6월 11일 수양대군이 15세 어린 왕을 위협하여 어보를
탈취하고 왕위에 오르자 하위지는 내심 목숨을 내놓고 어린 상왕을 보호할
결심을 한다.
수양측에서도 하위지의 인물됨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한 회유해보려고
정변 직후인 윤 6월 23일 그를 예조참판(종2품)으로 올리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푼다.
예조참의를 시킨지 불과 13일만의 일이었다.
하위지는 결심한 바가 있으므로 사직소도 올리지 않는다.
이에 세조는 7월 21일 다시 하위지로 하여금 세자 좌부빈객을 겸하게 한다.
그러나 세조도 내심 하위지에 대한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의 고집을 무참하게 꺾어놓아
집현전 학사들의 기를 꺾는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래서 8월 9일 세조가 사정전에 나가서 병조판서 이계전(1404~59),
참판 홍달손(1415~72), 참의 이예장(1406~56), 호조판서 이인손
(1395~1463), 참판 권자신, 형조판서 권준, 참의 윤사윤, 예조참판 하위지
등을 인견한 자리에서 이들이 대신의 정무의결권을 박탈하여 국왕이
친결하는 것은 구법에 어긋난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세조는 그 의견의
출처를 묻고 하위지에게서 나왔다 함에 기회가 왔다 하여 극도의 모욕을
가하며 참수하라는 어명을 내려 혼을 빼려 한다.
왕권을 절대화시켜 자신과 같은 반역자가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세조의 의도를 공신들조차 용납하려들지 않자 일벌백계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들의 반대를 제압할 필요가 있을 때 하위지가 적시에
그 적임자로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 정황을 세조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갔는데 병조판서 이계전, 참판 홍달손, 참의
이예장, 호조판서 이인손, 참판 권자신, 형조판서 권준, 참의 윤사윤,
예조참판 하위지, 이조참의 어효첨, 공조참의 박쟁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신 등이 육조에 전지한 것을 엎드려 보니 각기 그 직무를 직접 계달하여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태조가 개국하면서부터 일의 대소에 관계없이 모두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었는데 갑오년(1414)에 이르러 태종이 그것을
혁파하였다가 세종조에 다시 세워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옛 그대로 하십시오"
임금이 승지 박원형을 불러서 이계전 등에게 이렇게 전교한다.
"옛날에 삼공은 근본 도리를 말하여 다스리고 육경은 직무를 나누어
맡는다 하였으니 내가 이를 좇아 하고자 하는데 경들이 육조에서 만약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
이계전이 대답할 말이 없어 하위지를 돌아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상감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아뢰어야 하는가?"
하위지가 이렇게 아뢰었다.
"주나라 제도에 3공은 근본 도리를 말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3고는 삼공을
보좌하여 교화를 넓히고 6경은 직무를 나누어 맡는다 하여 3공과 3고가
비록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총재가 실제로는 겸해서 그것을
다스렸었으니 원컨대 주나라 제도를 좇으십시오"
"세조는 주나라 제도를 빙자하여 의정부의 국정의결권을 박탈하려
하였었는데 도리어 하위지의 박식에 걸려 의정부에 국정의결권을
되돌려주게 되자 분기가 치솟아 실성하기 시작한다.
누가 이런 물정 모르는 소리를 했느냐고 다그치자 이계전이 하위지와
함께 한 말이라고 겁에 질려 대답한다.
이에 하위지에게 관을 벗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호통친다.
"총재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임금이 돌아갔을 때의 제도이다.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또 내가 어려서 서무를 재결할 수
없으니 마침내 아래로 대권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주나라 제도와는 상관없이 현재의 상황을 들어 대신이 국정을 재결한 것은
임금이 죽었거나 어려서 부득이 그리 된 것이라는 투로 억지를 부리며
위졸에게 명하여 그 자리에서 하위지에게 곤장을 치게 한다.
그러자 운성부원군 박종우가 나서서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이
직접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되니 맡은 관청에 내려 다스리도록 하라고
만류하여 겨우 임금의 체통을 지키게 한다.
그래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은 세조는 승지 박원형으로 하여금 하위지의
머리채를 끌고나가 의금부에 가두라고 하면서 이렇게 전지를 내린다.
"하위지가 대신에게 아부하여 나를 어린아이로 비교하고 망령되게
고사를 이끌어 스스로 어질고 착함을 자랑하며 국가의 서무를 모두
의정부에 위임하려 하였으니 그를 추국해서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자신의 처사를 근시들조차 수긍하는 기색이 없자 이계전 등에게
"경들은 하위지를 현량하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만 얽매여서야 옳겠는가?"
하고 이어 의정부 사인 조효문(?~1462)을 불러 의정부 대신들에게는
"경들로 하여금 일을 서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권한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 아니니 혐의하지 말라.
하위지는 내일 마땅히 극형에 처할 터이니 그리 알라"고 전교하며,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이달 10일에 하위지를 조시에서 목베어 뒷날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경계하라"하는 등 부산을 떤다.
결국 죄를 용서하라는 종친의 권고를 못이기는척 받아들여 하위지를
친국하겠다느니, 도로 가두라느니 갈팡질팡하다가 의금부로 하여금 국문해
아뢰게 한 다음 8월 10일 의금부에서 하위지를 국문하여 아뢰니, 하위지를
부르라 명하고 승지들에게 이렇게 전교한다.
"하위지의 일은 오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 내가 영의정이 되어 바야흐로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고 있는데도
위지가 내게 이르기를 "원컨대 영상은 문종의 자자손손을 마음 다해
보필하십시오"하였다.
비록 취중의 말이었지만 실은 나를 의심한 것이다.
또 문종조에 내가 위지와 더불어 "병요"를 편찬해 마치고 더불어 일한
바의 사람들에게 내가 계청하여 작위를 더해주었었는데 위지만 홀로
사양하였으니 이 또한 잘못이다.
이제 또 죄가 용서받지 못할 데 있게 되었구나.
그러나 이 사람이 본디 정직하다는 이름이 있으니 나는 내 과실을 듣고자
하므로 특별히 너그러운 법에 좇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승지로 하여금 하위지에게 이렇게 전지한다.
"오늘의 일로 해서 내 잘못을 말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다만 이런 일만은 다시 말하지 말라.
너는 학술이 올바르지 않으니 의당 속히 이를 고쳐야 한다"
하위지가 세조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하여 그의 대권 탈취욕을 그때마다
견제한데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세조는 분김에 하위지를 꾸짖는데 몰두하느라 자신이 실제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도 모르게 실토한 결과가 되었다.
세조는 이때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었던 병조판서 이계전이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의 권한 박탈을
반대한다는 사실에도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8월 16일 연회 끝에 술이 과하니 그만 마시라는 이계전의
충성어린 권고에 불같이 노하여 "네가 나를 가르치려 하느냐"고 길길이
뛰며 병조참판 홍달손으로 하여금 이계전의 머리채를 잡고 뜰 아래로
내려가서 위사를 불러 곤장을 치라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네 죄는 비단 이뿐이 아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일맡는 것을 폐지하지 말라고 하위지와 더불어 같은
마음으로 아뢰었으니 너희들의 학술은 모두 바르지 못하다.
너는 지극히 간휼하여 병조를 맡을 수 없다.
네 직위를 파하고 달손으로 대신하겠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하위지가 세조에게 신하 노릇할 뜻이 전혀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오직 어린 상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이 그로 하여금 이같은 수모를
감내하면서까지 벼슬을 버리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동료들이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하려는 의거를 도모할 때 어찌 하위지가 빠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여 김질의 배신으로 일이 탄로나서 6월 8일 다른
사육신들과 함께 사지가 찢기는 극형으로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정직한
일생은 장렬하게 마감되고 만다.
추강 남효온(1454~92)은 "육신전"에서 그가 세조 등극 후에 받은 녹봉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에 의하면 하위지에게는 호와 박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박은 잡혀들어갈 때 나이가 20세도 못되었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이별하기를
청하고는 어머니께 꿇어앉아 이렇게 고하였다 한다.
"죽기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피살되었으니 아들은 홀로 살아 남을 수 없으나 다만
누이가 장차 비녀 꽂을 나이입니다.
비록 적몰되어 천한 노예가 된다 하여도 부인의 도리는 마땅히 하나를
지켜 마치는 것이니 개 돼지와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재배하고 나가서 죽으니 사람들은 하씨 문중에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한다.
9월 7일 지병조사 권언에게 노비로 주었다는 하위지의 처 귀금과 딸
목금이 이들이었을 것이다.
세조2년(1457) 3월 23일에는 하위지의 선산 전지를 좌의정 한확에게
내려준다.
하위지 일가가 하위지의 죄에 연좌되어 그 조카들까지 모두 변방의
노비로 귀양가 살게 되었었으나 세조9년(1464) 8월 26일에는 모두 외방에서
편한대로 살도록 노비의 신분을 면해주고 13년(1468) 9월 6일에는 아주
방면해주는데 실록에 거명된 이름은 하포 하분 하귀동이다.
"진양하씨세보"에 의하면 하포와 하귀동은 하위지의 막내 아우 하기지의
아들들이고 하분은 형 강지의 아들이었다.
하귀동은 뒤에 하원으로 개명하여 하위지의 양자가 되는데 하위지가
피살될 때 나이가 7세였고 하위지가 글을 남겨 그에게 뒷 일을
부탁하였었다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6일자).
탈취하고 왕위에 오르자 하위지는 내심 목숨을 내놓고 어린 상왕을 보호할
결심을 한다.
수양측에서도 하위지의 인물됨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한 회유해보려고
정변 직후인 윤 6월 23일 그를 예조참판(종2품)으로 올리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푼다.
예조참의를 시킨지 불과 13일만의 일이었다.
하위지는 결심한 바가 있으므로 사직소도 올리지 않는다.
이에 세조는 7월 21일 다시 하위지로 하여금 세자 좌부빈객을 겸하게 한다.
그러나 세조도 내심 하위지에 대한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의 고집을 무참하게 꺾어놓아
집현전 학사들의 기를 꺾는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래서 8월 9일 세조가 사정전에 나가서 병조판서 이계전(1404~59),
참판 홍달손(1415~72), 참의 이예장(1406~56), 호조판서 이인손
(1395~1463), 참판 권자신, 형조판서 권준, 참의 윤사윤, 예조참판 하위지
등을 인견한 자리에서 이들이 대신의 정무의결권을 박탈하여 국왕이
친결하는 것은 구법에 어긋난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세조는 그 의견의
출처를 묻고 하위지에게서 나왔다 함에 기회가 왔다 하여 극도의 모욕을
가하며 참수하라는 어명을 내려 혼을 빼려 한다.
왕권을 절대화시켜 자신과 같은 반역자가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세조의 의도를 공신들조차 용납하려들지 않자 일벌백계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들의 반대를 제압할 필요가 있을 때 하위지가 적시에
그 적임자로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 정황을 세조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갔는데 병조판서 이계전, 참판 홍달손, 참의
이예장, 호조판서 이인손, 참판 권자신, 형조판서 권준, 참의 윤사윤,
예조참판 하위지, 이조참의 어효첨, 공조참의 박쟁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신 등이 육조에 전지한 것을 엎드려 보니 각기 그 직무를 직접 계달하여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태조가 개국하면서부터 일의 대소에 관계없이 모두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었는데 갑오년(1414)에 이르러 태종이 그것을
혁파하였다가 세종조에 다시 세워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옛 그대로 하십시오"
임금이 승지 박원형을 불러서 이계전 등에게 이렇게 전교한다.
"옛날에 삼공은 근본 도리를 말하여 다스리고 육경은 직무를 나누어
맡는다 하였으니 내가 이를 좇아 하고자 하는데 경들이 육조에서 만약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
이계전이 대답할 말이 없어 하위지를 돌아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상감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아뢰어야 하는가?"
하위지가 이렇게 아뢰었다.
"주나라 제도에 3공은 근본 도리를 말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3고는 삼공을
보좌하여 교화를 넓히고 6경은 직무를 나누어 맡는다 하여 3공과 3고가
비록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총재가 실제로는 겸해서 그것을
다스렸었으니 원컨대 주나라 제도를 좇으십시오"
"세조는 주나라 제도를 빙자하여 의정부의 국정의결권을 박탈하려
하였었는데 도리어 하위지의 박식에 걸려 의정부에 국정의결권을
되돌려주게 되자 분기가 치솟아 실성하기 시작한다.
누가 이런 물정 모르는 소리를 했느냐고 다그치자 이계전이 하위지와
함께 한 말이라고 겁에 질려 대답한다.
이에 하위지에게 관을 벗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호통친다.
"총재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임금이 돌아갔을 때의 제도이다.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또 내가 어려서 서무를 재결할 수
없으니 마침내 아래로 대권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주나라 제도와는 상관없이 현재의 상황을 들어 대신이 국정을 재결한 것은
임금이 죽었거나 어려서 부득이 그리 된 것이라는 투로 억지를 부리며
위졸에게 명하여 그 자리에서 하위지에게 곤장을 치게 한다.
그러자 운성부원군 박종우가 나서서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이
직접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되니 맡은 관청에 내려 다스리도록 하라고
만류하여 겨우 임금의 체통을 지키게 한다.
그래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은 세조는 승지 박원형으로 하여금 하위지의
머리채를 끌고나가 의금부에 가두라고 하면서 이렇게 전지를 내린다.
"하위지가 대신에게 아부하여 나를 어린아이로 비교하고 망령되게
고사를 이끌어 스스로 어질고 착함을 자랑하며 국가의 서무를 모두
의정부에 위임하려 하였으니 그를 추국해서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자신의 처사를 근시들조차 수긍하는 기색이 없자 이계전 등에게
"경들은 하위지를 현량하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만 얽매여서야 옳겠는가?"
하고 이어 의정부 사인 조효문(?~1462)을 불러 의정부 대신들에게는
"경들로 하여금 일을 서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권한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 아니니 혐의하지 말라.
하위지는 내일 마땅히 극형에 처할 터이니 그리 알라"고 전교하며,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이달 10일에 하위지를 조시에서 목베어 뒷날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경계하라"하는 등 부산을 떤다.
결국 죄를 용서하라는 종친의 권고를 못이기는척 받아들여 하위지를
친국하겠다느니, 도로 가두라느니 갈팡질팡하다가 의금부로 하여금 국문해
아뢰게 한 다음 8월 10일 의금부에서 하위지를 국문하여 아뢰니, 하위지를
부르라 명하고 승지들에게 이렇게 전교한다.
"하위지의 일은 오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 내가 영의정이 되어 바야흐로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고 있는데도
위지가 내게 이르기를 "원컨대 영상은 문종의 자자손손을 마음 다해
보필하십시오"하였다.
비록 취중의 말이었지만 실은 나를 의심한 것이다.
또 문종조에 내가 위지와 더불어 "병요"를 편찬해 마치고 더불어 일한
바의 사람들에게 내가 계청하여 작위를 더해주었었는데 위지만 홀로
사양하였으니 이 또한 잘못이다.
이제 또 죄가 용서받지 못할 데 있게 되었구나.
그러나 이 사람이 본디 정직하다는 이름이 있으니 나는 내 과실을 듣고자
하므로 특별히 너그러운 법에 좇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승지로 하여금 하위지에게 이렇게 전지한다.
"오늘의 일로 해서 내 잘못을 말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다만 이런 일만은 다시 말하지 말라.
너는 학술이 올바르지 않으니 의당 속히 이를 고쳐야 한다"
하위지가 세조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하여 그의 대권 탈취욕을 그때마다
견제한데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세조는 분김에 하위지를 꾸짖는데 몰두하느라 자신이 실제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도 모르게 실토한 결과가 되었다.
세조는 이때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었던 병조판서 이계전이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의 권한 박탈을
반대한다는 사실에도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8월 16일 연회 끝에 술이 과하니 그만 마시라는 이계전의
충성어린 권고에 불같이 노하여 "네가 나를 가르치려 하느냐"고 길길이
뛰며 병조참판 홍달손으로 하여금 이계전의 머리채를 잡고 뜰 아래로
내려가서 위사를 불러 곤장을 치라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네 죄는 비단 이뿐이 아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일맡는 것을 폐지하지 말라고 하위지와 더불어 같은
마음으로 아뢰었으니 너희들의 학술은 모두 바르지 못하다.
너는 지극히 간휼하여 병조를 맡을 수 없다.
네 직위를 파하고 달손으로 대신하겠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하위지가 세조에게 신하 노릇할 뜻이 전혀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오직 어린 상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이 그로 하여금 이같은 수모를
감내하면서까지 벼슬을 버리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동료들이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하려는 의거를 도모할 때 어찌 하위지가 빠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여 김질의 배신으로 일이 탄로나서 6월 8일 다른
사육신들과 함께 사지가 찢기는 극형으로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정직한
일생은 장렬하게 마감되고 만다.
추강 남효온(1454~92)은 "육신전"에서 그가 세조 등극 후에 받은 녹봉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에 의하면 하위지에게는 호와 박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박은 잡혀들어갈 때 나이가 20세도 못되었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이별하기를
청하고는 어머니께 꿇어앉아 이렇게 고하였다 한다.
"죽기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피살되었으니 아들은 홀로 살아 남을 수 없으나 다만
누이가 장차 비녀 꽂을 나이입니다.
비록 적몰되어 천한 노예가 된다 하여도 부인의 도리는 마땅히 하나를
지켜 마치는 것이니 개 돼지와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재배하고 나가서 죽으니 사람들은 하씨 문중에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한다.
9월 7일 지병조사 권언에게 노비로 주었다는 하위지의 처 귀금과 딸
목금이 이들이었을 것이다.
세조2년(1457) 3월 23일에는 하위지의 선산 전지를 좌의정 한확에게
내려준다.
하위지 일가가 하위지의 죄에 연좌되어 그 조카들까지 모두 변방의
노비로 귀양가 살게 되었었으나 세조9년(1464) 8월 26일에는 모두 외방에서
편한대로 살도록 노비의 신분을 면해주고 13년(1468) 9월 6일에는 아주
방면해주는데 실록에 거명된 이름은 하포 하분 하귀동이다.
"진양하씨세보"에 의하면 하포와 하귀동은 하위지의 막내 아우 하기지의
아들들이고 하분은 형 강지의 아들이었다.
하귀동은 뒤에 하원으로 개명하여 하위지의 양자가 되는데 하위지가
피살될 때 나이가 7세였고 하위지가 글을 남겨 그에게 뒷 일을
부탁하였었다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