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섭 <서강대 국제대학교수>


두달전 어느 심포지엄에서 멕시코의 외환위기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멕시코는 1994년말 통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여 한달후에 IMF 구제금융이
발표되기까지 극심한 외환시장의 혼란을 겪었다.

물론 IMF구제금융이 혼란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큰 고통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긴축재정으로 인한 이자율상승은 대출이자율을 한때 연 1백%이상으로
올려놓았으며, 이로 인해 기업 부도와 인원감축이 속출하였다.

환율은 위기이전보다 1백20% 이상 평가절하되었으며 이로 인해 95년도
소비자물가는 52%나 증가하였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2중고를 의미하였는데, 인원감축 대상에서 요행히
제외되었다고 해도 명목임금을 삭감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질임금은
거의 반으로 줄어든 셈이 되었다.

그래도 실업자가 6백만명 이상 증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나마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행운에 속했다고 볼수 있다.

채무자들은 이자로 매달 10%씩 늘어나는 빚 때문에 파산하거나 재산을
압류당해야만 했다.

국가가 파산상태에 있으니 전 국민이 파산상태에 있는 격이었다.

한국과 멕시코의 상황이 비슷한가의 질문에 필자는 그러하며, 현재
멕시코의 신속한 회복을 보면 오히려 멕시코의 상태가 나을수도 있다고
답변했다.

95년 빈사상태에 있던 멕시코 경제는 96년 하반기부터 급속히 회복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이번엔 1982년의 위기때와는 달리 멕시코는 IMF의 도움으로
부도를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IMF 조건들을 초과 달성함으로써 외국인
투자가들의 신뢰를 빨리 회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는 1985년부터 이미 무역개방과 규제완화 민영화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미 제도개혁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이번 위기에 멕시코는 이러한 제도개혁을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이것은
IMF 조건과도 일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심포지엄에 참가한 사람들은 멕시코가 나을수도 있다는 말에 많이
언짢아 했던 것같다.

지금까지 고도 성장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던 한국이 반복되는 위기로
경제성장이 오랫동안 정지된 멕시코와 같아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상태는 오히려 95년의 멕시코 상황보다
더 악화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95년 멕시코 사태는 멕시코가 겪을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아니었다.

최악의 사태는 82년의 멕시코 외채위기였다.

이때 멕시코는 외환 부족으로 일방적인 외채상환 정지를 선언하였으며,
이로인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추방당하였다.

필요한 외화를 충당하기 위해 그동안 추진되어 왔던 무역자유화와
외환자유화를 후퇴시켜 수입제한조치와 외환통제를 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입은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규제강화는 그 외에도 그동안 민영으로 운영돼왔던 은행들을 국유화하는
조치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효율성과 유연성이 떨어진 경제는 회생할수 있는
잠재력을 잃어버렸으며, 국제 금융시장에 재진입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다.

이는 경제성장이 정지되고 실질임금은 계속 하락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한국은 멕시코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멕시코와 같은 위기가 닥칠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해왔으나, 위기는 닥쳤고 결국은 멕시코의 경우와 비슷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아직도 두갈래 길이 놓여 있다.

불행하게도 둘다 썩 마음내키는 길은 아니다.

1,2년만의 회복이냐, 아니면 "잃어버린 10년"이냐다.

그러면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IMF프로그램을 수용한 모든 국가 정부들은 일단 IMF조건의 이행을 약속하기
때문에 약속자체는 신인도를 높이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말로 이 조건들을 성실히 이행할 정부는 그렇지 않은 정부와
대비되기 위해서 IMF조건을 수행하는 것 외에 같은 방향의 추가적인 과격한
조치들을 발표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멕시코에서는 IMF조건에도 없는 외국인이 참가하는 공기업
민영화계획을 발표하여 외국인에게는 "배수의 진"으로 인식되어 신인도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국민이 할수 있는 일은 불행하게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것 같다.

힘을 합쳐 일하자는 것도 할 일거리가 없으니 공허한 구호가 될 수 밖에
없다.

실업은 이제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실업을 감수해야 한다.

외국인이 우리의 건실한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것을 감수하고 환영해야
한다.

다시 회복할 때까지의 어쩌면 길수도 있는 기간의 고통을 참고 구조조정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국민의 고통을 정부가 분담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국민화합으로 위기를 극복할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