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원년(1453) 4월 25일 단종은 사헌부 집의 하위지가 수양대군의
청으로 자신의 품계를 올린 것이 불법이라 하여 올린 사직소를 되돌려주는데,
하위지는 "세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간다"하였으니 임금을 직접 면대하여
품은 마음을 모두 얘기하고 물러나겠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단종은 이를 피하고자 하여 오늘은 목이 아파서 경연을 정지할 터이니
인견할 수 없으나 네 뜻을 모두 안다고 하며 벼슬에 나갈 것을 간곡하게
권면한다.

그러나 하위지는 이렇게 고집부린다.

"감히 벼슬에 나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제에 돌아가서 성상의 옥체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친히 품은
생각을 아뢰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단종은 이 뜻을 대신들에게 알리고 그 대책을 강구하게 하니 의정부
에서는 4월 26일 사인 이예장을 보내어 인견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아뢴다.

이 사실에 대해 실록에서는 그 때 대신들이 모두 하위지의 굳세고 곧으며
숨김없는 것을 꺼려서 인견하지 말도록 하게 하였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러나 단종은 불과 13세밖에 안된 어린 임금이었지만 하위지가 충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5월 3일 승정원에 이런 전지를 내린다.

"하위지가 여러 날 집에 있으니 의정부에서 그 출사를 의논하도록 하라"

하위지를 방치해 두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5월 4일 하위지의 사직을 받아들이고 하위지를 집현전 직제학(종3품
당하관)으로 승진시켜 집현전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하위지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5월 7일 즉시 상소하여 본직을 사면하였으나 가자한 자품은 그대로이고
오히려 벼슬은 전보다 더 좋아졌으니 더욱 더 받을 수 없다고 굳건히 사양
한다.

드디어 7월 24일 하위지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신이 다리 저는 병을 얻어 뼈마디가 시고 아파서 걷기가 곤란하니 경상도
영산 온정으로 가서 목욕하고자 합니다.

청컨대 신의 직책을 해임해주소서"

단종실록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한 끝에 이런 얘기를 덧붙이고 있다.

"처음 하위지는 여러번 가자를 사양하였으나 듣지 않자 글을 올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르기를 "늙은 여우가 가면 내가 오겠다"하니 대개
김종서를 가리킨 것이다.

구례에 집현전 관원이 질병으로 목욕을 청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르는
곳에서 음식을 공급하게 하여 은혜를 보였었는데 홀로 하위지에게만 없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김종서에게 덮어씌운
대목이다.

수양대군이 임금의 절대권인 인사행정을 천단하여 집현전 학사들마저
농락하려 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사직하고
낙향하는 최후 수단을 결행하는 마당에서 어찌 수양을 꾸짖지 않고 김종서를
꾸짖었겠는가.

늙은 여우가 수양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수양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엉뚱하게 김종서에게 그 누명을
덮어씌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단종은 그래도 하위지의 사직을 만류하고 싶어 4월 26일 녹만은 주라 하니
하위지는 이조차 단호하게 받지 아니하였다.

8월 15일 집현전 직제학 조어가 병을 핑계대어 상소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김종서가 작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하위지가 사람들에게 선언하기를 "상감께서 춘추가 장성하시면 마땅히
돌아오겠다"하였다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너는 그것을 본받지 말라"

"늙은 여우가 가면 내가 오겠다"는 말이 아니라 "상감이 춘추 장성하시면
내가 오겠다"는 말이었음을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양 일파가 미처 이 대목을 고치지 못하여 그 윤색이 탄로난 셈이다.

바로 상감이 장성하여 수양이 천단할 수 없게 되면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9월 30일 도승지 박중손(1412~66)이 이렇게 아뢴다.

"집현전 직제학 하위지는 오랫동안 경연에서 모시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신병으로 영산 온정에 갔는데 지금 거의 몇달이 되었으니 생각컨대
이미 병이 나았을 듯 합니다.

청컨대 소환하십시오"

단종은 이 소리를 듣자 바로 하위지를 소환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9월 29일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남 홍달손 등과 모의를 끝내고 10월
10일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조해 놓고 있었다.

이 사실을 단종이나 하위지가 어찌 꿈엔들 알았겠는가?

10월 10일 정변이 일어나 좌의정 김종서 부자와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등이 피살되며 안평대군이 역모의 수괴로 몰려
강화도에 안치된다.

대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이 되고 이조와 병조판서직을 겸임
하여 일체의 인사권을 장악한 다음 10월 15일 하위지를 사간원 좌사간(종3품)
성삼문을 우사간(종3품), 이개를 사헌부 집의(종3품)로 임명하여 안평대군을
비롯한 충의지사들을 죽이는데 앞장서게 한다.

수양은 하위지가 강직하여 이 벼슬을 받지 않을 줄 짐작하고 10월 16일
미리 임금으로 하여금 이런 교지를 내리게 한다.

"접때 대면하기를 청함에 내가 면대하여 듣고자 했지만 곧 권간에게 막힌
바 되어 인견할 수 없었고 너도 또 병을 청탁하고 갔었다.

권간이 지금 이미 죄로 죽었으니 실로 새로 시작하는 정치의 처음이라
특별히 너를 제수하여 좌사간을 삼았으니 병을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오도록
하라"

하위지가 벼슬에 나갈 리가 없다.

11월 4일 하위지는 임금을 뵙고자 하여 길을 떠났다가 병세가 덧쳐서
운신할 수가 없으니 벼슬 내리는 명령을 거두어달라는 간곡한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에 11월 11일 단종은 경상도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선산에서 병들어 있는
하위지에게 의원을 보내어 약으로 구제하고 때때로 술과 고기를 보내어 몸을
조섭하고 보양하게 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12월 23일에는 하위지에게 금년의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라고
호조에 전지한다.

뒤이어 12월 27일에는 하위지를 다시 집현전 부제학(정3품 당상관)에
제수한다.

그러자 12월 28일 하위지는 공로가 없는데 특별히 발탁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상소하여 사직한다.

그러나 단종이 아를 허락치 않고 벼슬에 나와 자신을 도울 것을 간절하게
요청하자 하위지는 어린 임금을 수양 일파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출사해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고 집현전 부제학의 벼슬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종 2년(1454) 갑술 1월 5일에는 38세의 집현전 부제학 하위지가
직제학 이석형 등 집현전 동료들과 함께 내불당을 헐어버리라고 상소한다.

이때 계속되는 왕실의 흉액이 내불당의 지세 탓이라는 참설이 돌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를 계기로 내불당을 철거하자는 것이었다.

1월 9일, 1월 11일 연속해서 내불당의 철거를 요청하지만 단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

3월 30일 춘추관에서 "세종대왕실록" 1백63질을 편찬하여 올리자 편수관
으로 이에 참여했던 하위지에게도 표리 1건과 말 한필을 하사한다.

4월 18일 시강관 하위지는 경연에서 이렇게 아뢴다.

"대저 글씨를 배움에는 다만 해서법뿐만 아니고 본받지 못할 글을 보아서도
안되는데 신이 전하가 쓰신 바 큰 글자를 보니 "청정현허"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경전(유교경전)에 실린 바가 아니니 반드시 불서일 것입니다"

이에 단종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본 바의 법첩은 곧 조맹부가 쓴 바로 불서가 아니다"

그리고 이어 그 책을 보여주는데 조맹부가 쓴 바로 글 뜻은 노자와 같았다.

이에 하위지는 "조맹부가 쓴 바로는 동서명같은 것이 본받을만 합니다"
하고 다시 아뢴다.

이로 보면 단종은 당시 유행하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글씨로 익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칠석날인 7월 7일에 대궐안에 있는 제사에서 기생을 불러다 잔치를
벌이는 일이 일어났다.

전례에 따른 행사였으나 문종의 대상(5월 14일)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사헌부에서 이를 탄핵하자 집현전 학사들도 모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마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궁지에 몰아넣어서 이를
농락하려는 수양 일파의 책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종조 이래 예법을 주도해온 집현전 부제학 하위지까지 법망에
걸려들게 되니 임금은 집현전과 춘추관 관원은 죄를 논하지 말라 하여 이를
특지로 사면한다.

9월 12일 하위지 등은 금년은 흉년이 들었으니 보루각(물시계를 설치해
놓은 집)을 개수하는 일을 정지하라고 상소하지만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12월 18일 경연에서 하위지는 중용을 진강하다가 보루각을 개수하는
것보다 종묘를 개수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아뢰며 보루각 개수의
정지를 청한다.

단종 3년(1455)은 하위지가 39세 되는 해이다.

이 해에 접어들면서 수양 일파는 왕위를 탈취하려는 수순을 밟아가기
시작한다.

우선 궁내의 단종 보호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2월 5일에는 사헌부 장령
이승소로 하여금 단종의 유모이던 봉보부인 상궁 박씨를 출궁시키라고 강청
하게 하고, 2월 27일에는 수양과 한확, 이계전, 신숙주 등이 빈청에 모여
금성대군과 화의군, 환관 엄자치 등 왕실내의 단종 보호세력에게 터무니
없는 죄를 씌워 이들을 단종으로부터 일차 격리시킨다.

드디어 3월 19일에는 세종때부터 대전 내시로 신임을 독차지하며 3대째
국왕의 신변을 보호해오던 환관 엄자치가 고신을 빼앗기고 공신호를 박탈
당하며 가산이 적몰된다.

그리고 3월 27일에는 제주관노로 영속시켜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도중에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소헌왕후가 돌아간 다음부터 세종의 특명으로 내궁을 통괄하며
단종을 보호해온 혜빈 양씨를 제거할 음모를 꾸며간다.

이런 왕위찬탈 수순속에 집현전 학사들을 어린 임금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일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4월 17일에는 사간원으로 하여금 임금의 배움이란 비록 성서나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덕을 함양 훈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니
노성하고 중후한 인물을 가려 뽑아 좌우에 근시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한다.

그러자 4월 18일 집현전 부제학 하위지 등은 경연의 중임을 감당하여
근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책임지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다.

수양 일파가 바라던 바였다.

사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4월 21일 다시 사직소를 올린다.

드디어 윤 6월 10일 하위지를 예조참의(정3품)로 옮기고 성삼문을 동부
승지로 옮겨 놓고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어린 임금을 위협하여 어보를
탈취하고 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