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러시아사.

러시아 유일의 앨범(사진첩)제작 회사로 꽤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60%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는 이 회사 사장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유시응(50세.모스크바거주)사장.

한국에서 라이터공장을 경영했던 그가 러시아에 첫발을 디딘건 지난 93년
봄.

한.소 수교이후 양국 경제협력단원으로 소련을 방문했던 형님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1년간의 탐색기간을 거쳐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한국 앨범과 문구류수입및
판매였다.

많을때는 한달에 20컨테이너를 들여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도전의식과 승부기질이 강한 그로선 이에 만족할리 없었다.

앨범수입판매를 시작한지 1년만에 서울에서 들여온 기계로 현지생산에
들어갔다.

모스크바에서 50km 떨어진 푸쉬킨시에 자금난으로 가동이 중단된 송전소
건물을 임대했다.

인구 15만명의 소도시에서 10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한지 3년만에 하청공장
까지 가동하면서 식구가 2백명으로 20배 가까이 늘어났다.

모스크바에 5개 대리점, 지방에 2개 대리점도 운영하고 있다.

유사장의 성공은 가히 경이적이다.

동토에 꽃을 피운 중소기업인, 입지전적 인물, 신화를 창조한 사나이.

유사장앞에 붙여지는 수많은 수식어들이다.

러시아시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면 이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득세 도로세 사회보장세, 부가가치세..

셀 수 없이 많은 세금을 공제하다 보면 수입의 70%가 세금으로 나간다.

그래서 러시아기업인들 사이에 탈세는 "능력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세금뿐 아니다.

마피아도 사업의 최대 장애요인이다.

유사장도 마피아에게 6시간동안 감금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있다.

사업이 잘된다는 소문에 관할권 싸움을 벌이던 마피아에게 끌려가 소위
"보호세"를 강요당한 것.

유사장은 "당시 러시아어를 잘 몰랐던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회상한다.

유사장에게 가장 안타깝고 분통 터지는 일은 한국인들끼리의 과당경쟁.

유사장의 성공사례가 한국언론에 한차례 나간 후 앨범을 싸들고 몰려든
한국 보따리 장사들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다.

올초 대거 몰려든 이들때문에 앨범가격은 뚝 떨어졌고 신용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보따리상인들이야 덤핑을 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현지생산을 하는 유사장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떨어진 가격은 회복이 안되고 이미 "맛"을 본 도매상들이 값을 깎으려고
흥정하고 있다.

또 한국산 앨범을 취급하던 대규모 중개상 2명이 판매업자마다 가격이
다른 한국제품을 믿을 수 없다며 홍콩쪽으로 거래선을 옮겨 버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사장은 러시아 진출을 꿈꾸는 한국기업인들에게
러시아시장을 절대 얕봐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긴줄, 텅빈 가게, 마피아 등 초창기에 소개된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이고
단편적인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판매자는 러시아 국민의 평균 월급은
2백달러도 채 안되지만 이들의 안목은 월소득 3만달러하는 국민들 만큼 높다.
러시아와 국민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오만하게 굴지 말고 소비자 취향에
맞춰 제품을 공급해야 한다"

러시아인들은 고인에게 짝수의 꽃을 바치며 또 노란색을 싫어하고 검정색과
군청색계열을 좋아한다는 설명과 함께 사전에 문화 기호 취향 등을 면밀히
검토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국산품이용을 기피하고 "아메리칸드림"에 사로잡혀 있는 러시아국민성향을
이용, 현지 생산제품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박아넣고 제품명을 "아메리카나"
라고 붙인 것도 성공의 한 비결이었다는게 유사장의 귀뜀이다.

< 모스크바=류미정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