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과 윤효상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김치수는 사고방식과 생활감각이
다른 자식들의 세대에 대해 반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그들은 너무도 다르다.

어떻게 이혼한 부부가 저렇게 천연스레 아무 일도 없었던 옛날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고민을 말할 수가 있을까?

"서양놈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한다니까. 허허허허, 상것들 같으니라구"

그는 겉으로는 웃어버리지만 속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니야, 그게 바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

이미 헤어진 것은 지나간 과거이고 지금은 기분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친구일 수 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자기의 낡은 사고와 굳어버린 감각을
일신해서 신세대적으로 사고해야 할 것이라고 각성한다.

젊은이처럼 회전이 빠르고 감각적으로 날카로운 김치수는 지영웅에게
반해서 죽기 살기로 나오는 영신에게 너그러운 아버지로서의 부성애를
가져보자고 반성해본다.

만약 영신이 "나는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 골퍼와 헤어지지
못합니다"하고 나오면 그때는 영신에게 자기가 양보해야 할까? 골이
지근지근 아프다.

아스피린을 한알 입에 넣다가 말고 그는 심장에는 좋은 그약이 위에는
나쁘다는 임상실험 결과가 생각나서 세상에 정말 완벽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쓴 입맛을 다신다.

오전중에 밀린 결재들을 다 마쳤을때 옆방에 있는 영신의 방에서 전화를
하는 소리가 난다.

그는 마침 친구에게 전화를 넣으려던 참이었으므로 전화기를 놓지 않고
언젠가처럼 딸의 전화를 도청한다.

그는 그 도청이 그리도 즐겁고 재미있다.

"얘, 그러니까 백 프로 잘 맞는 부부가 없는 거야"

약간 허스키한 영신의 친구가 하는 소리다.

목소리가 상당히 매력이 있는 여자다.

"그래서 그들이 이혼한데?"

"아니. 영주는 말이야,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 섹스는 맞는데 그
남자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혼을 하지는 않구, 당분간
갈데까지 가본대. 그 후 말과 기분이 통하는게 중요하냐, 아니면 그것이
더 중요한가 판단이 나면 그때 가서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한다는 거지"

"남편은 모른대? 영주가 그렇게 오랫동안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걸"

"조금은 아는가봐. 그런데 그 남편은 좀 이상해. 그야말로 X세대사고야.
어차피 한 백년 살 것도 아닌데, 자기 모르게 은밀하게 연애를 하랜대.
철학교수다운 발상이야. 대학교수치고 괜찮은 인간이지?"

"어머, 정말 굉장한 남자다. 의식이 한 차원 앞섰다"

"얘, 존경스럽지 않니? 그러니까 너도 연애를 할 수 있다면 해라.
그러나 이혼은 서로 힘드는 일이니까, 더 늙기 전에, 기운없어 못 하기
전에 즐기자. 그대신 들키지 않게"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