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배임, 종금사는 블랙홀"

은행권에서 1천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았던 해태그룹이 결국 화의를 신청
함으로써 협조융자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다.

일부에선 현재 마련중인 협조융자협약이 해태로 인해 사실상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다.

해태사례에서 협조융자체계의 문제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은행은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그 돈은 대부분 종금사로 흘러들어갔다.

조흥은행은 "10월까지 물품대금 결제용으로 5백47억원만 지원해 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난달 30일과 31일 약3백억원의 자금이 모자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흥은행은 "파악결과 해태가 종금사로부터 어음연장을 받으면서 약
1천68억원규모의 진성어음을 담보로 맡긴 것이 그 원인으로 파악됐다"고
설명했다.

종금사들은 보유한 진성어음의 기일이 돌아오면 교환에 회부, 자금결제를
받은 후 예금으로 묶어두는 방식을 활용해 해태의 자금줄을 조였다.

예금을 대출금과 상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재정경제원이 대출금회수자제를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에 편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해태는 조흥 등 8개은행이 지원한 돈을 만져 보지도 못한채
밀려드는 자금결제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수입물품에 대해 결제를 하지 못해 은행이 96억원의 대지급을 해야
했다.

조흥은행은 이같은 대지급을 해태가 결제하지 않아 추가적인 협조융자는
아예 논의조차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종금사가 전적으로 잘못한 일이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은행들이 협조융자를 해주면서 해태가 종금사에
1천억원규모의 진성어음을 담보로 제공한 사실을 몰랐다는데 있다.

조흥 상업 서울등 채권은행의 여신담당 임원들은 한결같이 진성어음 담보
제공을 보고받은바 없다고 밝혔다.

더구나 조흥 장기신용등 2개은행의 차장급 실무자들이 협조융자가 결정된
지난달 15일이후 자금관리단으로 파견됐지만 이들도 이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은행의 여신실무자들은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애초부터 부실화가 눈에 보였는데도 무리하게 협조융자를 실시해 은행의
부실화를 부채질했고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가중시켜 은행의 대외신인도만
떨어뜨리지 않았느냐는 지적이다.

일부 관계자들은 아예 은행들이 배임죄를 저지른 것이나 진배없다고 주장
한다.

대출을 소홀히 취급함으로써 종금사 좋은 일만 시키고 결과적으로 은행에는
손해를 끼친게 아니냐는 얘기다.

이에대해 해태의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은 "협조융자를 해주는 대가로
1천3백억원에 이르는 해태음료와 해태타이거즈의 주식을 담보로 잡았기
때문에 절차상의 문제는 없었다"고 내세우고 있다.

또 "부도처리하기엔 너무 아까운 업체였던데다 자구의지도 강력해 한번
살려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해태사태는 부도유예협약의 대안으로 은행권에서 한창 논의중인
협조융자 협약추진에 제동을 걸 전망이다.

협조융자를 해도 기업이 살아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돈을 대주느냐는
여론이 비등해졌기 때문이다.

협조융자협약은 이미 사실상 백지화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당초부터 은행의 공동부실화를 촉진한다며 일부은행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인데 해태사태가 이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이는 오히려 중견기업들의 자금난을 불러 일으키는 결정적인 전기가 될지도
모른다.

< 이성태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