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거함 IBM, 재기에 성공하다"
루이스 거스너 IBM 회장의 취임 4주년을 며칠 앞두고 있던 지난 3월 하순,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같은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거스너 회장이 취임하던 당시만 해도 IBM은 도저히 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월 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미국 언론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4년만에 IBM은 언론의 평가를 돌려 놓았다.
"되살아난 공룡"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IBM의 괄목상대할 만한 변신은
월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몇가지 경영지표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92년 6백48억5천만달러였던 매출이 지난해 7백59억5천만달러로 17%나
늘어났다.
경영수지는 93년 80억달러 가까운 적자를 냈던 데서 작년에는 50여억달러의
흑자로 돌아섰다.
93년 한때 40달러선으로까지 곤두박질쳤던 주가는 실적 반전에 힘입어
최근 1백30달러를 넘나드는 수준으로 회복, "빅 블루(주도주)"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IBM의 회생과 관련,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지표 중 하나는 지난 10년간 이
회사의 임직원이 40%나 줄어든 반면 매출은 거꾸로 40% 늘어났다는 대목이다.
거스너 회장 취임이후의 4년 동안에만도 종업원 1인당 매출액이 58%나
올랐다.
IBM의 이같은 변신에는 "자기를 부정하는" 눈물겨운 투쟁의 한서린 역정이
배어 있다.
거스너 회장은 취임한 뒤 "한번 IBM맨은 영원한 IBM맨"이라던 종신고용주의
(Non-layoff)를 내팽개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IBM은 지난 1911년 설립 이래 "한번 IBM에 입사한 사람은 제발로 걸어나가
기 전에는 결코 해고하지 않는다.
자발적 퇴직자도 재입사를 희망하면 받아들인다"는 "IBM주의"를 자랑스레
지켜왔다.
그러나 거스너호의 IBM은 새 출범과 함께 80년 넘게 지켜져 온 이 전통을
휴지통에 내버렸다.
불과 1년새 4만5천명이나 정리한 것을 시작으로 전체 종업원의 절반
가까이를 해고했다.
인원 정리의 잣대는 경쟁력이었다.
"조직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원을 잘라내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냉혹한 경영원리를 어김없이 적용한 것이었다.
이같은 "외과 수술"은 IBM 개혁의 시작일 뿐이었다.
인원 등 조직 감량에 이어 손을 댄 것이 회사 내부에 만연돼 있던 관료
주의를 털어내는 작업이었다.
당시 IBM의 관료주의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지 "인파이팅
(infighting)을 잘해야 IBM에서 살아 남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일선 사업부서가 신규 바이어를 발굴해도, 새로운 거래를 시작
하기 위해 몇개 관련 부서의 승인을 받는데만 최고 1년 이상 걸리기 일쑤였다
그 사이에 힘겹게 잡았던 바이어는 다른 경쟁사로 거래선을 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뿐 아니었다.
스피드가 생명인 신개발부서에서도,제품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등을
재무본부로부터 시시콜콜한 것까지 승인을 받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 신제품
출시의 타이밍을 놓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거스너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눈을 돌려 회사 밖 손님을
찾아보라"고 고함쳤다.
IBM 창사 때의 정신인 "고객 우선주의"로 되돌아가라는 주문이었다.
"고객"을 회사 업무의 최우선에 둔다면 내부 알력 같은 관료주의는 저절로
뿌리뽑힐 것이라는 게 거스너 회장의 생각이었다.
몇십년 묵은 관료주의가 하루 아침에 고쳐질 리는 없지만, IBM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
우선적인 변화는 업무 처리의 초점이 고객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스너체제의 IBM은 이와 함께 과거 무원칙하게 운영되던 판매사업 부문을
소매.금융 등 특정 산업별로 재조직했다.
그 결과는 "고객"들에 대한 보다 신속하고 체계적인 서비스로 나타나고
있다.
"뉴 IBM"의 진면목은 훨씬 빨라진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이 회사가 판매한 메인 프레임용 정보저장 장치가 일부 부품의
불량으로 인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종전 같으면 IBM은 자사 엔지니어들을 동원해, 그것도 1~2년에 걸쳐
문제를 해결하는 게 상례였다.
그러나 IBM은 "전혀 비IBM적인" 해법을 내놓았다.
이 분야의 경쟁사인 스토리지 테크놀로지사와 제휴를 체결, 신속한 문제
해결을 의뢰키로 하는 결정을 발표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같은 일련의 "내과 수술"은 피폐해져 있던 IBM의 건강 상태를 상당히
호전시켰다.
그러나 이 정도로 IBM이 재기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는 게 전문가
들의 지적이다.
거스너 회장의 말마따나 "가야할 길의 3분의 2정도를 왔을 뿐"에 불과하다.
고질적인 관료주의가 아직도 회사 내에서 온전하게 불식되지 않고 있는 게
해결 과제중 하나다.
최근 IBM의 신규사업 개발부서 책임자는 규모가 급팽창하고 있는 인터넷
산업을 겨냥, "서버"컴퓨터 시장 진출을 확대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러자 이 프로젝트에 무려 4개 사업부서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여기에 소프트웨어 사업부까지 참견하고 나섰다.
"마치 다섯개의 서로 다른 회사와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프로젝트 담당자는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넌더리쳤다.
초스피드화하고 있는 신기술 경쟁시대에 이런 관료주의를 완전히 털어버리
지 않는 한 또다른 위기와 맞부닥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건 당연하다.
이같은 우려는 일부 현실로 입증되고 있다.
예컨대 세계 정보기술산업 시장은 지난해 13%나 성장한 반면 이 부문에서
IBM의 시장 점유율은 3년새 3%포인트 낮아진 12%로 떨어졌다.
IBM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87년의 경우 세계시장 점유율은 21%를
기록했었다.
IBM이 진정 "되살아난 공룡"으로 대역전 드라마를 장식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그 길이 어떤 것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의 IBM은 과거의 IBM이 아니다.
그러나 미래의 IBM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된다"는 리처드 토먼
재정담당 부회장의 진단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