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중(67 )전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이 회고록 "둔마가 산정에 오르기까지"
(태일출판사)를 펴냈다.

이 책에는 고시합격후 외무부에 첫발을 들여놓은 56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재직중 외무부장관 임명통고를 받고 귀국하는 88년말까지의 인생여정이
그려져 있다.

"말띠인 나는 준마라기보다 둔마에 가까웠어요.

턱걸이로 고시에 합격한뒤 승진도 동료들에게 뒤지기 일쑤였죠.

적성에 맞았기 때문인지 포기하지 않고 한발한발 성실하게 걸었더니 어느새
산정에 도달했더군요"

서울대 재학중 정치학보 창간호에 장래 희망을 주UN대사라고 기고했던
그는 "외무부에 발을 들여놓은지 32년8개월만에 외교총수의 자리에 올랐으니
둔마치고는 억세게 복이 많은 둔마"라고 말했다.

국제경제국장과 통상국장을 거쳐 핵심요직인 본부3역(기획관리실장
경제차관보 정무차관보)을 두루 맡고 내부승진으로 장관직에 오른만큼
일복과 관운이 모두 좋았던 셈이다.

회고록에는 외교관 입문에서 장.차관비서, 58년 주미대사관 3등서기관
부임, 주일2등서기관으로 한.일회담을 치뤘던 일, 통상진흥과장으로
미.일지역 수출진흥회의와 수출진흥광관장회의를 마련하던 얘기등이
담겨있다.

주미참사관 시절 대미항공로 개설및 섬유협상문제로 밤잠을 설치던 일화와
주제네바 공사때 국제회의에서 북한측의 억지를 의연하게 받아넘겨 박수를
받은 내용도 소개돼있다.

말레이시아 벨기에대사에 이어 상공부차관에 임명돼 컬러TV 덤핑시비를
해결하느라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던 그는 1년반만에 사우디아라비아대사로
다시 출국, 유가하락으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한 국내 건설업체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등 바쁘게 뛰다가 대사정년을 앞둔 88년말 장관으로 금의환향했다.

"아이들 교육때문에 고생했죠.초창기엔 교육비지원이나 주택수당등이
없어 박봉을 쪼개야 했어요.

60년까지는 달러지출때 대통령결재까지 받았지요"

그렇게 키운 아이들도 이제는 의엿하게 장성해 큰아들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고 둘째는 국내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는 "관운과 인복은 타고나기보다 스스로 얻어내야 값지다"며 "세상일이
잘풀리고 안풀리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회고했다.

"자신이 먼저 좋은 동료가 되고자 노력하고 훌륭한 상사가 되도록
처신하며, 윗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부하가 되려고 정진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통일고문회의 고문이자 세종재단 이사인 그는 요즘 세종연구소에 주3일
출근하며 두번째 책을 준비중이다.

북방외교와 미.일관계등 주제별 외교사안에 대해 깊이있게 서술할 계획.

회고록출판기념회는 22일 오후6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외교협회주최로 열린다.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