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삼석 < 체육부장 >

국제축구연맹(FIFA)집행위원회가 열렸던 스위스 취리히에서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결정이라는 희소식이 날아온 때가 지난해 5월31일.

어느새 1년3개월이나 지났다.

당시 전해진 낭보에 우리 국민들은 "단독 개최가 아니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월드컵을 유치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런 쾌거"라며 다투어 축배를 들었다.

관계당국의 움직임도 신속 활발했다.

월드컵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월드컵축구 조직위원회가 발족됐고,
월드컵축구 지원법이 제정되는 등 뭔가 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월드컵 열기는 차갑게 식은 것 같아 안타깝다.

공동개최국인 일본의 경우 10개의 개최도시를 확정한 데다 이미 2개의
경기장을 완공할 단계에까지 올라섰을 정도다.

이에 비해 우리는 개최도시 확정은 커녕 개막식을 치를 축구전용구장 건설
마저 원점을 맴돌 정도로 지지부진하다.

우리나라의 얼굴인 서울시의 자세는 더욱 한심하다.

당연히 월드컵 개막식을 개최해야 할 곳이면서도 적극적인 추진계획은
내지 않고 헷갈리는 얘기만 되풀이 하고 있다.

서울의 행정책임을 맡았다가 지난 10일 사직한 조순 전 서울시장의 행태는
그야말로 한토막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는 사임 이틀전 마지막 정례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2002년 월드컵
서울 개최를 위해 시는 축구 전용구장 건설을 위한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빠른 시일내에 적당한 시유지를 물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더해 "이것이 시장으로서의 마지막 지시"라고 강조까지 했다.

이같은 지시가 종전과 다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퇴임할 때야 나왔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동안 서울시는 "시민의 전폭적인 성원에 따라 긍정적으로 검토는 할 수
있으나 이에 앞서 정부의 대폭적인 자금지원과 시의회의 승인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뚝섬 돔구장을 축구경기장으로 사용하거나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이용하면
된다는 등 깊은 검토가 결여된 방안도 되풀이 제시했었다.

사퇴를 공언한 당사자가 이처럼 기존 입장과 상반되는 발언을 하자 일선
실무자들은 대권을 의식한 그야말로 "정치성 인기전술"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에 더해 "생색은 떠나는 높은 사람이 내고 무거운 짐은 시청 실무자에게
떠맡기는 무책임한 처사에 배신감을 느꼈다"며 허탈해할 정도였다.

조순시장의 뒤를 이은 강덕기 서울시장 직무대리는 10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안인 월드컵 축구전용구장과 관련해 "월드컵개최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용구장건립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중앙정부와 월드컵조직위
체육계 등 각계각층의 여론을 모아 건립여부를 신중히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도 적극성과 구체성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기존정책과
다름없다.

결국 계속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젠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

유치실사단의 점수를 따려고 추운 겨울날씨에도 축구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축구팬들의 성원과 차량마다 월드컵코리아 스티커를 달았던 국민들의 뜨거운
정성을 바탕으로 월드컵유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이같은 관점에서 서울의 송파구 방이동, 도봉구 창동 등 여러 후보지중
한곳을 속히 확정해 월드컵전용구장 건설에 범정부차원에서 발벗고 나서야
한다.

또 당초 유치신청서에 넣었던 동대문운동장의 축구전용구장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것만이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고 월드컵유치에 한마음이 됐던 온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