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컬렉션 가이드] '비엔날레' 유감 .. 설치미술 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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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국제적 미술행사가 올해엔 유난히 많다.
베니스 비엔날레 리용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에 이어 지난 9월1일에는
제2회 광주 비엔날레가 개막됐다.
비엔날레라는 말이 격년제 예술행사를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다.
새로 정비된 전시관과 2년 사이에 훨씬 많이 자란 중외공원의 수목들,
그리고 비엔날레 종사자들의 더욱 자신감 있는 표정에서 광주 비엔날레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전시 내용에 들어가면 아직도 대중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다.
이미 1회 비엔날레를 통해 성격과 내용이 어떨 것이라는 점작을 했어도
현대미술의 단면들이 그리 친근하게 접근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 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출품작 대다수가 비디오
오브제 등 설치작품 일색이어서 아무리 현대미술이라지만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런 것도 예술이 될수 있구나"라는 상식의 전복과 "그렇다면
나도 할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비아냥을 동시에 가지게 되고 그 모든
반응이 소득내지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거대한 현대미술 행사나 메커니즘은 언제나 대중을 주눅들게 했다.
방송사가 나서 홍보도 하고 현대미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대중은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머리로 이해는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현대미술을 이해시키려는 아카데미나 강좌
프로그램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일들이 생략된 채 성급한 의욕만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정말 우리는 대중들의 무지를 탓하고 그들의 미의식을 개조시켜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는가.
우리의 미술문화 환경과 인프라를 생각해 보자.
사실 서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아직 변변한 미술관이 없다.
미술관은 시민들 가까이서 시민들의 휴식과 교육, 정보센터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하면서 시민 생활과 밀접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미술관도 제대로 없고 있다 해도 볼거리, 즉 소장품도 없으며 볼 만한
전시도열리지 않는 실정이다.
현대미술 자체가 본질적으로 오랜 시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많은 작품을 경험하다 식상할 단계나 한계에 이르렀을때 찾아나선
낯설고도 새로운 충격이다.
위 시민들은 사실 충격적 미술을 받아들일수 있는 정서적 준비가 되지
있지 못하고 속칭 "이발소 그림"이라도 마음껏 즐길 문화적 토양과 기회다
없다.
대중에게 교양교육시키듯 현대미술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뷔르트 미술관이 펼치고 있는 사원복지 차원에서 컬렉션 같은 체계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선행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언제나 마음놓고 드나들면서 즐길수 있는
"미술의 집"을 마련하고 잘릴 정도의 풍부한 작품들이 갖춰진 저변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비엔날레 같은 행사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9일자).
베니스 비엔날레 리용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에 이어 지난 9월1일에는
제2회 광주 비엔날레가 개막됐다.
비엔날레라는 말이 격년제 예술행사를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다.
새로 정비된 전시관과 2년 사이에 훨씬 많이 자란 중외공원의 수목들,
그리고 비엔날레 종사자들의 더욱 자신감 있는 표정에서 광주 비엔날레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전시 내용에 들어가면 아직도 대중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다.
이미 1회 비엔날레를 통해 성격과 내용이 어떨 것이라는 점작을 했어도
현대미술의 단면들이 그리 친근하게 접근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 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출품작 대다수가 비디오
오브제 등 설치작품 일색이어서 아무리 현대미술이라지만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런 것도 예술이 될수 있구나"라는 상식의 전복과 "그렇다면
나도 할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비아냥을 동시에 가지게 되고 그 모든
반응이 소득내지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거대한 현대미술 행사나 메커니즘은 언제나 대중을 주눅들게 했다.
방송사가 나서 홍보도 하고 현대미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대중은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머리로 이해는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현대미술을 이해시키려는 아카데미나 강좌
프로그램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일들이 생략된 채 성급한 의욕만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정말 우리는 대중들의 무지를 탓하고 그들의 미의식을 개조시켜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는가.
우리의 미술문화 환경과 인프라를 생각해 보자.
사실 서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아직 변변한 미술관이 없다.
미술관은 시민들 가까이서 시민들의 휴식과 교육, 정보센터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하면서 시민 생활과 밀접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미술관도 제대로 없고 있다 해도 볼거리, 즉 소장품도 없으며 볼 만한
전시도열리지 않는 실정이다.
현대미술 자체가 본질적으로 오랜 시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많은 작품을 경험하다 식상할 단계나 한계에 이르렀을때 찾아나선
낯설고도 새로운 충격이다.
위 시민들은 사실 충격적 미술을 받아들일수 있는 정서적 준비가 되지
있지 못하고 속칭 "이발소 그림"이라도 마음껏 즐길 문화적 토양과 기회다
없다.
대중에게 교양교육시키듯 현대미술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뷔르트 미술관이 펼치고 있는 사원복지 차원에서 컬렉션 같은 체계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선행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언제나 마음놓고 드나들면서 즐길수 있는
"미술의 집"을 마련하고 잘릴 정도의 풍부한 작품들이 갖춰진 저변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비엔날레 같은 행사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