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왕실들에는 비명에 가거나 횡사를 한 왕비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어떤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건 그녀들의 삶과 죽음에는 아직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영국 헨리8세의 두번째 왕비로 엘리자베스1세의 어머니인 앤 볼린도
비운의 왕실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3년간을 프랑스에서 보낸 뒤 15세때 귀국하여
헨리8세의 왕비였던 캐서린의 시녀가 되었다.

왕은 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왕가의 혈통 단절을 염려한 나머지
캐서린과의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앤을 만나게 되었다.

헨리8세는 교황에게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황에 맞섰다.

왕은 마침내 앤과 비밀결혼을 하여 그 사실을 공표해버렸다.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게 되자 왕은 당시 27세였던
그녀를 간통과 근친상간이라는 오명을 씌워 처형했다.

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여인이었다.

계몽전제군주였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14세때 루이16세와 정략결혼을 한 그녀는 사치벽이 심해 "적자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가 하면 조작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몇차례의
염문설등으로 왕비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앙투아네트는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 4년뒤인 93년10월16일 38세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국고를 낭비했고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이었다.

미국 인기 영화배우로 모나코왕 레니에3세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1982년 9월 근교의 여름별장에서 왕궁으로 돌아오던중 교통사고로 53년간의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떠돌던 부부불화설로 죽음에 의혹을 남기기도 했다.

엊그제는 찰스 영국왕세자와 이혼한 다이애나 빈이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최근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아온 염문 상대자와 함께 탄 승용차를
추적하는 상업사진작가들을 따돌리려다 발생한 윤화이다 보니 시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녀가 남기고 간 교훈은 무엇일까.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