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가 걸출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듯이 경제도 어려울수록 탁월한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특히 요즘처럼 경제전반에 걸쳐 어느 한구석 제대로 풀리는 곳이 없을
때는 기업이나 국민들이 정부쪽을 자주 쳐다본다 해서 나무랄 일만도 아니다.

사실 이렇게 어려울때 진가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 경제관료요,
경제정책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민들의 84%가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정책이 여론과 따로 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경제정책에 대한
실망을 넘어 "원망"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산하 국민경제교육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경제정책의
형성과 여론의 역할"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는 이같은 국민들의 불신이
위험수위에 도달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응답자의 2.2%만이 "약간 만족한다"고 답했을
뿐 "별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8.9%, "전혀 만족하지 않는다"가
25.1%로 나타나 경제정책의 신뢰도가 바닥을 드러냈다.

또 대다수의 응답자가 시중 여론이 경제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것은 경제정책이 현실과 괴리된채 겉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가 아니더라도 요즘 정부의 경제정책이 곳곳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목격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기업의 연쇄적인 좌초로 경제가 총체적 난국에 빠지고 기업들은 악성
루머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정부 정치권 등 누구하나 책임지고
수습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

정권말기의 행정기강 누수현상이 심각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규제완화와 자율화로 정부의 정책수단이 없는 만큼
중요한 판단은 모두 기업과 국민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라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의욕도 소신도 상실한채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그럭저럭 때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눈치보기와 보신에만 급급한 것처럼
보이는 경제정책 담당자들에게 들려줄 말이 있다.

"경제에는 임기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는 곧 경제정책의 일관성과 무한책임을 강조하는 말에 다름아니다.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책의
일관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침 저녁으로 달라지는 경제정책으로는 정책의 성공에 필수적인 국민적
협조를 기대할수 없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주의적 정책결정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일부 엘리트집단 만이 경제정책에 참여하는 권위주의적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 일본 등 선진국처럼 여러 이해집단과 국민들의 의견을 정책형성과정에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형식적인 여론수렴과정 만으로는 경제정책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걷어낼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