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미 지영웅은 그녀에게서 사라진 영웅이 된 것 같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서 그를 아쉬운 듯이 바라본다.

그리고 꼭 타야할 때에 못 탄 버스를 바라볼 때처럼 기막힌 안타까움으로
그를 바라본다.

"나는 영 가망이 없어진 것 같네"

그래도 지코치는 가만히 웃기만 한다.

영원히 자기를 만나주겠다던 대사는 이미 어느 호텔의 침대위에선가
사라져버렸다.

포말같은 사랑의 기억일 뿐인가? "지코치,나 지금 한가지 소원이 생겼어"

그녀는 깔깔깔 미친 듯이 웃다가, "지영웅을 닮은 복제인간을 하나
만나고 싶어"

"내가 무척도 사랑했던 여사님, 내가 말하려는 인디오 여인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요"

지영웅은 한참 말을 끊었다가, "사랑은 꽃과 같답니다. 활짝 핀 아름다운
꽃이 지면 다시 똑같은 꽃으로는 필 수 없듯이 사랑도 지고나면 그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디오 여자들은 마음이 변한 남자를 결코 다시는 찾지 않는대요.

똑같은 꽃이 다시 피지 않듯이 우리들의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복제인간! 지영웅을 나는 갖고 싶어. 이혼을 원하면 그렇게 하겠어.
하루를 살다 죽어도 나는 자기같은 남자와 살고 싶어"

그녀는 처녀처럼 열망을 갖고 말한다.

"하하하하, 복제인간 이라구?"

정말 편리한 발상이다.

복제인간은 만들어도 그때의 그런 열망을 그대로 재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좋아. 그럼 이제 불가능을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지코치를 닮은
남자를 찾아 나서야겠군. 도무지 세상이 재미가 없어. 날이 갈수록. 겨우
지코치를 만나는 것으로 나의 행운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이젠 정말
한심하게 됐네"

그녀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성큼 일어서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도 지코치가 열렬히 애무했던 통통하고 결이 고운 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관계는 끝났다.

글썽한 눈으로 커피숍을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지코치는 알알한
서글픔을 느낀다.

한때는 정말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여자였는데....

그는 8시에 약속돼 있는 연습자에게로 가기 위해 커피숍을 쓸쓸한
마음으로 떠난다.

그는 자기가 영신에게로 가기 위해 이렇게 여러 힘든 고비들을 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사랑해요 영신....

그대는 나를 변신시켜준 마음의 의사요.

영신, 빨리 나아서 나와 함께 햇빛속을 걸으면서 장타를 날려봐요.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나서 가장 길고 힘있는 장타를 날릴 거야.

그리고 프로를 딸 거야.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미스 김이 전화기를 들이댄다.

여자의 음성이 들린다.

"안녕하세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