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야"

지난 주말 신유공업의 이상문(47)사장은 만나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그는 지난해초부터 부품용 호스를 기아자동차에 납품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럼에도 납품기회를 잡지 못했다.

제품개발이 끝났는데도 납품을 못하게 되자 너무나 속상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납품을 못하게 된 걸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기아로부터 받은 어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

실제 그는 2년전 대영전자산업의 부도로 1억2천만원어치의 어음을 날려
버린 뼈아픈 경험을 가졌다.

이때 부도를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해결사들이 몰려 왔다.

구두를 신은 채 그의 안방에 들어와 아내에게 돈을 못내 놓을 형편이면
옷이라도 벗어 줘라는 수모까지 겪었다.

어음과 휴지.

이 두가지는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것 외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부도를 맞으면 어음은 휴지로 바뀐다.

이 휴지야말로 정말 골칫덩어리.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다.

찢어버리든지, 태워버리든지 그 액수만큼 빚이 남는다.

이 빚 때문에 많은 업체들이 줄이어 망한다.

올들어 부도를 낸 기업은 이미 5천개를 넘어섰다.

놀라운건 이들중 1천5백여개 업체가 어음을 쥐고 있다가 망했다.

지난주 부도를 낸 광주의 동진금속도 마찬가지.

도대체 어음관리 잘못으로 망하는 기업이 왜 이렇게 많은가.

이 의문은 기업간 거래 여건을 알게 되면 쉽게 풀린다.

우리나라에선 기업간 결제대금중 70%이상이 어음으로 거래된다.

현금거래는 30%에도 못미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음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판가름난다.

더욱이 이 어음들은 대부분 결제기간이 긴 어음들.

따라서 심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기업환경에선 어음관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일찌감치 장사를 그만두는게 낫다.

첨단기술을 가져서 아얘 돈걱정은 하지 않고 장사를 한다며 큰소리치는
젊은 기업인들을 자주 만났다.

지난 20년간 중소기업현장을 찾아다녔지만 이런 사람치고 오래 살아남아
있는 경우를 본적이 없다.

첨단기술개발, 선진국시장개척, 노사화합등을 자랑하는건 좋다.

그러나 다음 세가지만큼은 잘 알아두자.

먼저 3일에 한번씩은 사내에 어음관리대장이 제대로 정리되고 있는지 살펴
보자.

특히 보유어음의 액수만 계산하지 말고 어느회사 어음인지를 확인하자.

의심나는 회사 어음은 빨리 돌려버리는게 최선.

할인이 불가능할땐 단기간내에 물품대금으로 지급토록 하자.

한 중소기업자가 토로한다.

"요즘같아선 정말이지 어음을 손에 쥐고 있으면 등줄기에 땀이 난다"고.

이렇게 불안에 떨기 보단 중소기업 공제기금에 가입해 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1층에 있는 공제기금(785-0010)을 찾아가 보자.

이 기금에 가입하면 한낫 휴지가 돼버린 어음도 보상을 해준다.

소액어음은 할인도 받을 수 있다.

셋째는 소문을 너무 등한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문은 언젠간 사실로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해 왔다.

설마하면서 혼자만 엇길로 가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곳엔 커다란 구렁텅이가 있을 뿐이다.

서울 소공동과 역삼동 사채시장에 나가면 그들 나름대로 기업체 평점을
매겨 놓은 자료가 있다.

멀쩡한 대기업인데도 위험명단에 들어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런 회사의 어음은 받지 않는게 좋다.

그래야 처음엔 손해를 보지만 나중엔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게 된다.

< 이치구 중소기업 전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