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등록대수가 1천만대가 되는 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업체인 기아그룹이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여 부도방지협약 대상 기업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은 특히 오너없이 전문경영인에 의해 운영되어
왔고 오로지 자동차 한 업종에만 주력해온 국민적 기업이라는 점에서 기아의
좌절은 안타깝기만하다.
하루속히 기아가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잇따른 기업의 경영위기를 목격하면서 과연 이러한 사태가 언제나 끝날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만 한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부침은 일상적인 일이라고는 해도 지금 우리 경제
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일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모든 경제주체가 힘을 모으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여러차례에 걸친 부도사태와 금융경색으로 어려워진 기업
경영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업의 생존능력이 의심받을 때 시장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많은 기업이 루머나 불황의 장기화로 불의의 경영난에 봉착하는
일을 방관하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기업이 급변하는 환경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한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업의 체질강화가 필수적임은 물론이며 또 그 일을 할 책임이
기업 스스로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기업이 그동안 양적 성장에만 몰두해온 나머지 선진국들에 비해서
2배이상 높은 부채비율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기업들은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높은 부채는 고성장과 고수익이 됫받침되지 않는 한 경영위기의 우려를
가중시키게 되는 것이다.
고비용-저효율의 우리 경제구조하에서 과거와 같은 고성장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업들은 무엇보다도 재무구조개선을
통하여 기업체질을 강화해나가는 길만이 타인에게 기업의 운명을 위탁하는
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와 관련, 최근 정부는 기업의 과부채해소를 위하여 결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기업의 뿌리깊은 차입경영관행을 고려할 때 정부가 강력히 나서는
것을 무분별한 개입이라고 비난할 수 만도 없다.
문제는 방법과 정도, 그리고 시기의 적합성에 있다.
재무구조개선을 위한 정부의 정책은 차입금과다법인에 대한 세제상
불이익을 확대하고 동일계열 여신한도제를 도입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시각은 기업의 관점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기업재무구조문제를 기업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양적 성장정책, 금융의 자율성결여 등 외생적 요인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한 채 기업만 비판하고 기업만 고치려 시도하는 것은 숲과 나무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재무구조개선을 위해서는 벌칙강화에 앞서 재무구조개선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의 정비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고려는 적시에 수반되지
못하고 있다.
고용조정의 어려움, 유상증자제한, 외자조달규제, 부동산매각시의 과다한
조세부담 등 각종 제도가 부채축소를 위한 기업의 노력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재무구조 개선대책들이 시기적으로 적합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기업에 부담을 주는 정책들을 경기불황기에 시행하는 것은 장기적인
체질강화라는 목표를 이루기에 앞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기업들의 경영난을
가중시키게 될 것이다.
아울러 정책의 영향에 대한 논의가 충분치 못한 점도 아쉽다.
아무리 작은 정책이라도 기업에는 사활이 걸린 것이 될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
한편 기업체질강화를 위한 정부의 개입과 규제는 또다른 명분의 개입과
규제를 정당화시키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은 잇따른 부도사태와 날로 격화되는 경쟁속에서 기업체질을
강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기업실력에 비해 재무구조가 나쁜 기업들은 돈을 빌리기도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튼튼한 재무구조는 정부에서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는 시장경제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금융개혁을 가속화시킴으로써 자금이 효율성을 따라 움직이게 하는
금융시장을, 경쟁을 통하여 효율적이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물시장을, 능력에 따라 보수를 받는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어가면
기업체질은 자연히 강화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이처럼 경쟁을 통해 효율이 살아나는 시장경제를 조성하는데
힘쓰는 것과 동시에 기업이 자기 능력에 알맞는 외양을 갖출 수 있도록
기업구조조정을 적극 지원해주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규제를 통한 단기적 성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기업과 시장이 시행착오를
거쳐가면서 자생적인 체질강화를 도모해 나가도록 하는 환경조성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비록 느린 것 같지만 가장 빠른 길이요, 먼 것
같지만 질러가는 길이라 하겠다.
기아사태를 보면서 고투하고 있는 기업에 채찍을 들이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