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사 - LA타임스 신디케이트 독점전재 ]

홍콩이 1백55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배를 마감하고 중국에 반환됐다.

홍콩반환은 지난 82년 영국의 마가릿 대처 전수상의 방중을 계기로 본격
협상이 시작됐으며 84년 대처수상과 자오쯔양 중국 총서기간에 맺어진
''영-중 공동선언''으로 매듭지어졌다.

당시 영국측 실무책임자였던 제프리 하우 전영국 외무장관은 "글로벌
뷰포인트"에 기고한 글에서 홍콩의 장래가 낙관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홍콩
주민과 북경정부 모두 인내를 시험받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우 전장관의 기고를 요약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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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인구는 중국의 0.5%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은 중국 GDP의 4분의1에 달한다.

홍콩은 두개의 서로 다른 고대 문화가 만들어낸 독특한 성공작으로
평가돼 왔다.

모험과 역경에 대한 중국적 기질과 잘 정비된 정부조직 및 법규정에 대한
영국적 취향이 잘 혼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환이후 홍콩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한 먹구름으로 덮여있다.

다 아는 일이지만 영국과 중국은 1897년 베이징조약을 통해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99년간 조차하기로 합의했다.

7월1일자로 그 기간이 만료된 것이다.

80년대 초부터 영국과 중국은 공통의 목적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홍콩의 지속적인 정치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이 그것이다.

이는 영국이 협박으로 강탈한 식민지 홍콩의 주권을 어떤 방식으로
중국측에 넘겨주는가 하는 문제였다.

특히 그동안 이뤄놓은 경제적인 번영을 훼손시키지 않는 일이야 말로
주요 관심사였다.

반환협상이 시작된 것은 지난 83년이었다.

당시 중국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은 1국가2체제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이
문제를 아주 재치있게 다루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나는 순조로운 권력이양을 위해 노력했다.

그때는 LA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중국측 협상대표였던 오학겸 전중국 외무장관에게 영국과 중국은
릴레이 파트너"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통의 릴레이와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넘겨주려는 것은 바통이 아니라 엄청난 값이 나가는 "명조시대
도자기"였다.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잘 넘겨주고 받는 일이야 말로 우리들의 관심사였다.

이어 84년 12월 대처총리와 중국의 자오쯔양 총서기가 97년 7월1일 홍콩의
중국반환과 50년간의 자치를 약속한 역사적 공동선언에 최종 서명했다.

중국은 "외교적 승리"라고 자축했으나 영국은 식민지배의 종식을 아쉬운
마음으로 되씹어야 했다.

홍콩특별행정구(Special Administration Region)에 관한 기본법의 핵심은
1국 2체제와 항인항치"(홍콩사람이 홍콩을 다스린다)라는 원칙하에 국방
외교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에 따라 홍콩은 독자적인 정부조직과 태환가능한 자체 통화를
유지하면서 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독립된 사법부도 갖는다.

시장경제체제도 그대로 유지되며 개인의 자유 또한 보장된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과 중국 사이에는 불가피한 난제들이 놓여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임시입법의회 선출문제다.

중국은 지난해 12월 21일 영국과 홍콩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
입법국을 유명무실하게 만들 임시입법회 의원 선출을 강행했다.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홍콩인들에
대한 인권보장-불간섭은 완벽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홍콩시민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민주적인 법과 제도
하에서 자유를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홍콩은 91년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입법국 의회를 직접 선거에 의해
구성했다.

사실 식민지 1백여년동안 홍콩은 영국에서 파견된 총독 한사람에 의해
지배됐다.

행정과 입법의 권한을 모두 장악해온 것이다.

입법국이라는 것도 총독의 입법자문기관에 불과했다.

영국은 반환을 앞둔 시점이 아니라 30년전쯤에 홍콩을 민주화시켰어야
했다는 지적도 있다.

홍콩의 민주화가 오래전부터 정착됐었다면 중국에 의해 홍콩의 민주화가
퇴보하는 사태는 없을 것이란 얘기다.

영국은 최근에 들어서야 홍콩에 민주적인 제도와 절차를 전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중국은 홍콩식 삶에 대한 존중 이라는 공동성명에 위배되지 않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지난 89년6월4일 천안문 사태와 같은 유혈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장한 젊은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것은 중국의 지배권력들이
문화혁명의 잔인한 학살극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영국과 중국은 홍콩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다.

나의 후임자인 더글러스 허드 장관과 중국의 새로운 파트너인 전기침
외교부장은 홍콩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타임테이블에 동의했다.

이는 홍콩 주민들에 의해 직접 선출된 입법국이 홍콩의 주권이양 이후
97년 새로운 홍콩특별행정구의 초대 입법부로 바뀐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직접 선출되는 입법의원 숫자의 단계적인 증가도 기본법에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같은 계획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같은 사태발전은 영국의 보수당 의장을 지낸 크리스 패튼이 92년 홍콩
총독으로 임명된데서 비롯됐다.

패튼총독은 취임후 이전의 협상결과를 무위로 돌리고 새로운 정치개혁
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중국은 당시 이같은 제안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최종 주권반환행사를 둘러싼 대부분의 오해는 이때 형성됐다.

지난 4년간 패튼 총독은 중국관리들에게 홍콩 반환과 관련, 한마디의 말도
건넨 적이 없을 정도다.

중국이 영국과 홍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6년 임시입법의회를 구성해
홍콩에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현입법국은 7월1일 해체되고 중국정부가 구성한 임시입법회가 정식
입법회로 들어서게 된다.

이같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홍콩 장래에 대한 견해는 난관적이었다.

이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입법국의 연속성 부재와는 관계없이 홍콩특별행정구의 다른 핵심적인
제도가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의 대법원장으로 안드레이 리씨가 임명됐을 때 홍콩인들은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패튼총독이 새 각료를 선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홍콩특별행정구의 초대행정장관으로 둥젠화 전동방해운그룹총수가
선출됐을 때도 홍콩인들은 환영일색이었다.

홍콩은 7개월동안 두개의 정부가 병존하는 전무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권력중심은 둥젠화의 임시내각과 임시입법의회로 기울고
있었다.

홍콩의 미래는 새로운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홍콩특별행정구는 본토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벌률과 규칙
등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중국 또한 홍콩주민들의 자치가 중국의 약속대로 높은 수준까지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새로 선출된 입법의원들이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홍콩의 민주주의를
독자적으로 실현할지 온세계가 지켜볼 것이다.

홍콩의 장래는 현재로선 베이징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홍콩주민들 자신에게도 달려있다.

홍콩을 지금과 같은 번영된 곳으로 만든 것은 홍콩인들의 용기와 그들의
판단에 기인한다.

또 누가 뭐래도 베이징은 홍콩의 능력을 발휘시키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게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는 홍콩 지도자들의 융통성 사회체제 홍콩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과정일 것이다.

중국 역시 자존심과 자국이익을 위해 험난한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세계는 중국의 홍콩 끌어안기에 대한 결의가 홍콩주민들의 지혜로움에
의해 뒷받침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홍콩의 중국반환은 세계사의 큰 분수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질적인 관심은 12억 중국에 편입될 인구 6백40만의 홍콩이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현체제를 지킬 것인가에 집중돼
있다.

오는 2027년까지 홍콩의 현체제를 지속한다는 일국양제가 보장될지 여부는
전적으로 중국에 달려있다.

< 정리=장진모 기자 >

[[ 약력 ]]

<>영국 재무장관 (1979~83)
<>영국 외무장관 (1983~89)
<>영국 부총리겸 하원의장 (1989~90)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