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0시를 기해 마침내 중국이 홍콩의 주권을 되찾았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난징(남경)조약 이후 실로 1백55년만의
주권회복이다.

이 역사적인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기자의 뇌리속에는 한 위대한
중국인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청조 말엽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리려 일생을 바쳤던 소전 이홍장이다.

이홍장이야말로 오늘날 영국이 홍콩을 송두리째 돌려줄 수 밖에
없도록 역사에 교묘한 "시한장치"를 해놓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1842년의 난징조약과 1860년의 제1차 베이징조약으로 홍콩섬과
구룡반도 일부를 "영구"할양받은 영국은 1898년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조차지역을 오늘날의 신계지까지 확대하는 제2차 베이징협상을
요구해왔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으로는 이를 거절할 도리가 없었고 협상대표인
이홍장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전은 한가지 단서를 달았다.

조차기간을 난징조약이나 제1차 베이징조약과 달리 "99년"으로 못박자는
것이었다.

소전은 "중국에서 99는 영원을 뜻하는 구구와 같은 의미"라며 영국측을
회유했다.

이 말을 영국측이 곧이 곧대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베이징조약에서는 조차기간이 99년,즉 1997년까지로 명시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982년 9월.대처 영국수상은 중국을 방문,덩샤오핑
(등소평)을 만난다.

15년 앞으로 다가온 신계지의 조차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덩은 대처의 요구를 거절하며 오히려 영구조차지인 홍콩섬과
구룡반도 전체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은 국제법상 말도 안되는 요구라며 거절하지만 결국은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중국측이 신계지를 돌려받은 후 수도와 전기공급을 끊어버리면 홍콩은
고립무원의 지경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홍콩을 돌려받은 중국은 "50년간의 1국양제"라는 또다른 시한장치를
해놓았다.

이 시한장치가 50년뒤 국제정세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주목된다.

임혁 < 홍콩특별취재반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