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전화 같은데? 당신이야 항상 애인이 있었으니까. 뭐 별로 새로운
사실도 아니지. 나야말로 그걸 다 참고 살아준 멍청이, 얼간이
남편이었다구"
그는 빈정대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녀에게 차가운 조소를 보낸다.
한번도 윤효상이 그녀에게 이런 잔인한 얼굴을 보인 적은 없다.
어느새 팔당대교 근처에 와 있다.
"도대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둘이 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자 영신은 울상이 된다.
"나는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데요"
영신은 겁을 먹으면서 조용하게 몸을 도사린다.
"우리 오래간만에 별장에 가보는데 어떻겠어? 이렇게 헤어지는 쪽으로만
치닫지 말고 좀 더 온건하게 살아보는 방향으로 나가는게 어떻겠어?"
"당신은 나하고 살고 싶다는 의사가 없었으니까 미스 리에게 애를
만들었을게 아니에요?"
"그건 오해야. 미스 리가 우리 관계를 깨버리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나아게 고백했어"
"미스 리가 거짓말을 했다고 믿지 않아요. 당신이 떼라고 강요해서
그동안 뗐는지도 몰라도 더 이상 애를 유산하면 안 돤다고 했대요. 그래서
뗄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 애는 지금 결사적이야. 나하고 결혼을 하면 사장부인이 되는데
나같아도 결사적으로 우리 이혼을 부추길거야. 그렇게 해석 안 해?"
그러자 영신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무척 비싼 시계가 햇빛에 반짝 빛난다.
김치수 회장이 영신의 생일 기념으로 생전 처음 3천만원 상당의 시계를
사주었다.
자동차 한대를 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이다.
윤효상에게는 그녀의 손목보다 그 시계가 더 매력적으로 보였었다.
그것은 가난한 공무원의 아들로 자란 그로서 어쩌면 당연한 물질적
용망인지도 모른다.
그랜저 한대가 굴러가는군 하고 윤효상은 그녀의 시계를 볼때마다
놀렸었다.
"나는 시간이 없어요. 별장에 가면 6시까지 압구정동에 돌아올 수
없잖아요?"
영신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윤사장은 그녀의 그 침착함에 악마적인 분노를 느낀다.
"별장까지만 드라이브하고 곧 돌아오면 되지. 싫은 남자하고 같이
있기도 싫을 테니까"
알기는 아는군요. 그년 더욱 더 침착해지면서 그가 핸들을 집으로
돌리기를 바란다.
아직까지 윤효상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안 한 사람이어서 지금도
별로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가 야누스인 것은 사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