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높은 사람과 통화를 하게 되자 둘이는 잠시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어느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잔뜩 긴장해 있는 윤효상에게 영신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윙크를 보낸다.

늘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여자 김영신의 여유만만한 것이 바로 이런
미소띤 윙크다.

윤효상은 그녀의 높은 콧대를 꺾고 싶다.

그것은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김치수 회장에게 느끼는 반항심이며 아직
40대의 피가 끓는 윤효상의 저항심인지도 모른다.

영신이 윙크를 했기 때문에 효상은 속으로 보복심이 끓어 올랐다.

어쩌면 이들 부녀는 싫증난 재킷을 벗어던지듯 자기를 버리려고 할까?

참으로 비인간적인 부녀가 아니고 뭔가? 있다는 것 가지고 자기의
인격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가? 그는 격한 기분이 되며 전화가 끝나자
쏘는 듯한 시선으로 장인을 향해 외친다.

"회장님, 제가 버릇이 없다고 나무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장인어른의 사회적 지위나 권위 때문에 자연인으로서의 사위의
대우를 한번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바라지도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회장님께서는 이십대후반부터 마흔넷이 되는 지금까지
영신씨에게 저의 청춘을 다 바친 공로로 저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시겠습니까?"

"우리 영신이가 자네에게 바친 세월은 무엇으로 보상하겠나?"

김치수 회장은 냉정하게 그러나 여유만만하게 묻는다.

"아내는 재혼이었고 저는 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김치수 회장이 아주 시니컬하게 껄껄껄 하고 크게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탠다.

"자네는 아내를 벌어먹인 일이 있는가? 실크사업 수업을 받은 영신은
자네에게 그 사업적인 수완을 전수해주었네. 계속해서 자네가 실수를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막아주고 회생시켜주고 그랬지.

이제 와서 연상의 와이프이고, 또 돈있는 집 딸이라고 자네가 위자료를
달라는 것인가? 허허허허, 요새는 아내에게 위자료를 받는 세상이
되었는가?"

사실 그는 윤효상에게 지금 딸네 부부가 하던 실크회사의 주를 전부
주고 이혼을 허락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과 의지가 모자라는 윤효상은 가만히 있으면 다 챙겨줄 밥을
미리 달라고 하다가 혼이 나고 있는 것이다.

"미도견직이 요사이 자네의 실수로 크게 낭패를 보고 있지만 그래도
그건 큰 위자료의 구실을 할 수가 있어.

자네가 구태여 위자료를 달래서 하는 소린데, 나는 내 딸을 배신한
자네의 경솔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릇이 안 되는 자네에게 우리 영신이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하고 있는 애비야"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