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DVERTISEMENT

    [천자칼럼] 밀서리 재현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60년대후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봄철에서 초여름에 이르는 기간(음력 4~5월)에는 의례히 춘궁기가 찾아
    왔다.

    농촌에서 전년도 가을에 걷우어들인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여름곡식인
    보리나 밀이 아직 여물지 않아 끼니를 이을수 없던 이른바 보릿고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로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가뭄이나 홍수
    메뚜기 피해등으로 보릿고개가 자주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겨져 있다.

    보릿고개가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해마다 겪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탈취하는
    한편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소작농의 토지경작권을 박탈하여 반봉건적
    지주제를 확립시키고 농촌의 계급구도를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했다.

    그 결과 소작농은 전체 농가의 80%에 이르렀다.

    소작농은 수확물의 평균 50%를 넘는 소작료를 비롯 세금과 공과금,
    용수료와 수리조합비, 토지공사비와 수리비, 마름의 보수, 지주와 마름에의
    접대비 등을 제하고 나면 전체 수확량의 24~26%밖에 취득할수 없었다.

    소작농은 빚을 얻어 사들인 곡식이나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만 했다.

    전체농가의 48%가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었다는 1930년 조사통계도 있다.

    가장 혹심한 보릿고개는 1931년 만주신변 이후 일제의 극심한 약탈과
    겹치는 흉년으로 광복 이전까지 이어졌다.

    광복 이후 1949년 토지개혁으로 농민이 제땅을 가질수 있게 되었으나
    남북 분단, 해외귀환동포와 월남동포에 의한 인구 증가, 6.25전쟁의 전화
    등으로 보릿고개는 60년대 전반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보릿고개라는 말은 60년대 후반부터의 경제 고속성장으로
    까막득히 잊혀져 버린 추억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게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뒤편 한강둔치 밀밭에서 보릿고개 시절에
    행해졌던 밀서리가 재현되었다.

    배가 고픈 아이들이 몰래 밀을 베어다 불에 익힌 뒤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벼 알갱이를 먹던 습속이다.

    지난날 보릿고개를 되돌아 보면서 한톨의 곡식이라도 아끼는 마음을
    가다듬어 보라는 의미가 깃든 행사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7일자).

    ADVERTISEMENT

    1. 1

      [한경에세이] ETF와 오컴의 면도날

      바야흐로 투자의 전성시대다. 2020년 코로나19 이후 전례 없는 글로벌 유동성 공급은 주식과 부동산, 가상자산을 가리지 않고 가격을 끌어올렸다. 당시 투자 경험이 없던 사람들까지 시장에 뛰어들었고, 투자가 더 이상...

    2. 2

      [시론] 지속 가능한 돌봄, '대체'가 아닌 '공존'

      2025년, 한국은 공식적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전체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시대다. 고령 인구는 올해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으며 2050년에는 전체의 40%를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응...

    3. 3

      [천자칼럼] '청년 일자리 큰 장' 삼성 공채 70년

      삼성그룹이 공개채용을 시작한 해는 1957년이다.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이다. 당시 삼성물산 채용에 1200명 넘게 몰렸고, 이 중 27명이 선발됐다. 혈연·지연 중심의 채용 관행이 일반적이던 시절 신문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