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시로 승화시킨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통해 전쟁의 아픔을
잊어가던 때가 엊그제만 같다.

수십년이 흐른 어느 날 같은 제목의 시집을 선물로 받았다.

오래전 작고하신 모교수님으로부터였다.

내가 어릴 때 모교수님은 가족들과 함께 청주에 내려와 계셨다.

C대의 국문과 과장으로 계셨던 것이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학창시절 조곡을 들으면 그 시가 생각나곤 했다.

성년이 된 뒤 어느날, 국립묘지 참배를 다녀오면서 갖가지 감회에
사로잡혔다.

민족적 수난을 겪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국립묘지에도 우리처럼 그렇게
많은 무명용사의 무덤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은 조선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시호를 받으신 충강공
어른의 후손이어서 조선조가 내린 보은을 입었다.

가계에 대대로 내려오는 글을 보면 충신의 집안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가득하다.

어른들은 일제도 충의가 깃든 충신가의 저항엔 겁을 먹고 조심했다고
말하시곤 했다.

할아버지도 조선조가 망하자 함경도 국경을 지키시다 낙향해 오셨다.

군인이 되기 전엔 이인(초대 법무장관)선생의 선친과 함께 수학하셨다고
했다.

오빠 역시 공군사관학교에 기상학을 정규과목으로 개설하게 함으로써
모교로부터 표창을 받은 군인으로서의 삶을 보냈다.

신록이 점차 짙푸른 색으로 변해가는 6월은 한여름을 예비해야 하는
달이다.

모판에서 나약한 채로 옮겨져야 성장을 기약할 수 있는 식물들을 위해
이식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되는 달인 것이다.

성장을 위해 땅에 기댈 기둥감을 박아 묶어주고 잎을 따주는 일을
놓치면 수확은 커녕 보릿고개를 면키 어렵게 된다.

북한이 오늘처럼 끔찍한 기아상태에 빠진 것은 전쟁준비에 광분한 나머지
계절과 절기에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충일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지키느라 먼저 가신 분들의 충혼에 다시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작은 일에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