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는 순간 지코치는 그만 뒤로 휘청 넘어질뻔 한다.

거기에는 학원에서 만났던 미아라는 재수생이 서 있는게 아닌가.

"오빠, 어디 여행갔다 오세요? 백영 오빠 아니세요?"

"응. 세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영이 오빠, 내가 그 가방 밀어드릴게. 집이 여기 황제 오피스텔인가
봐요?"

"아니. 여기는 우리집이 아니야"

지영웅은 경계태세를 갖추면서 오피스텔 입구로 밀고 들어가던 여행용
큰 백을 자기 앞으로 슬쩍 끌어당긴다.

꼭 무슨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아이 같다.

"영이오빠, 정말 반가워요. 그렇잖아도 외국에 가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오빠는 미국교포지요?"

미아가 공연히 넘겨짚으면서 묻는다.

그러자 지영웅은 교포 행세를 해서 이 아가씨의 집요한 눈초리로부터
해방이 되고 싶다.

"오빠, 차 한잔 사드릴게요"

"짐은 어떻게 하구?"

지영웅이 볼부은 소리를 한다.

그녀에게 자기의 아지트를 들키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할까? 그는 잠시 난처하다.

귀찮은 아가씨같으니라구.

"그럼 내가 여기 친구네집에 짐을 맡겨놓고 올테니까. 저기 저 카를로스
커피숍에 있을래?"

지영웅은 우선 그녀를 어디엔가 떼어놓고 싶다.

이런 아가씨와 사귀어 봤자 말짱 헛것이다.

결혼을 할 처지도 못 되고,아무튼 추군거린다는 인상이다.

"영이 오빠, 그럼 기다릴게요. 빨리 다녀오세요. 내가 좀 더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

"필요없어"

귀찮게 군다. 끈적거린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 자기가 냉정하게
여자를 잘라버리지도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가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믿을 데가 없는 그는 언제나 여자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일까?

"카를로스에서 기다려줘. 아가씨, 10분안에 올테니까"

그는 그녀가 커피숍 안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나서 서서히 짐을 밀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간다.

일단 차한잔을 마신 후에는 냉정하게 그녀를 떼어버린다는 작전을 쓸
것이다.

그는 거의 3주일 이상을 비워 놓은 자기 거처로 들어가자 썰렁하다든가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목욕도구를 챙겨들고 카를로스로 간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