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신문 해외뉴스란에 미국 어느 아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양육방법이 잘못돼 자기를 응석받이로 키워서 훌륭한 어른이
되지 못했으므로 사회생활을 충분히 하지 못한다는게 그 이유였다.

따라서 아버지는 양육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그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였다.

이 소송이 어떻게 결말 났는지 알수 없지만 최근 우리사회를 둘러보면
이런 소송을 받을만큼 자녀를 응석받이로 기르는 가정이 없지 않다.

반면에 너무 엄격한 아버지상도 있다.

"동물기"로 유명한 시튼 (1860~1946)의 아버지 경우이다.

시튼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가 20세가 됐을 때 아버지가 시튼을 서제로
불렸다.

"나는 지금까지 너를 위해 온갖 의무와 책임을 다 해왔지만만 이제부턴
네 스스로가 책임을 져라"면서 "네 생명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게
부모에게 빚진 것이지만 그 건 할수 없는 일이고 딴 부채에 대해 네
주의를 환기시킨다"며 장부를 내놓았다.

거기엔 시튼 출생시 부터의 비용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공인회계사인 아버지 장부에 따르면 모두 5백37달러50센트가 들었고
연 6%의 이자를 덧붙여 청구하고 있다.

이때 시튼은 전액 상환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가 실제 전액 상환했는지 여부는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우리 부자관계로선 너무 살벌하고 윤리에 어긋나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다.

또 현행 민법은 부모에게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 의무"
(9백15조)를 지우고 "부양의 의무" (9백74조)도 있으므로 법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 경우다.

원래 부자관계란 법률이전의 인륜의 관계이다.

그렇지만 "어버이 날"을 앞두고 두 극단적인 경우가 생각나는 건
가정에서 부자는 서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선 소설 "아버지"가, 일본에선 하야시 교수의 "부권의
복권"이란 책이 베스트셀러였다 한다.

하야시 교수는 가족이 흩어져 "호텔가족"이라 불리는 상황아래 "부권"은
"가족이 서로 협력해서 각자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
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세상은 급속히 변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