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관심이 부도위기에 몰린 진로그룹에 온통 쏠려 있다.
한보그룹과 삼미그룹의 부도파문에 이어 진로그룹마저 쓰러지면 우리
경제의 모습은 또 흉한 모습으로 일그러진다는 위기의식도 나타나고 있다.
경제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의 체면도 구겨지게 된다.
대기업그룹이 줄줄이 쓰러질 정도로 우리 경제가 위기의 벼랑에 섰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부실징후기업 부도방지협의체"란 이상한 이름의 기구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로그룹의 부도위기를 정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맥주사업에 대한 과도한 시설투자와 유통사업쪽으로의 사업다각화가
오늘날의 화를 초래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 계열사들의 지난해 적자규모는 진로쿠어스맥주 3백96억원, 진로건설
6백66억원, 진로종합유통 7백37억원에 이른다.
백화점사업을 하는 진로종합유통의 지난해 적자규모가 가장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같은 진로그룹의 사례는 최근 너도 나도 유통업에 뛰어들고 있는 우리
기업들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표본이 되고 있다.
"격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사업으로 인식되던 유통업이 언제부턴가
한국의 기업들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요즘 재계에서는 "아직도 유통업 안 하십니까"란 인사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진로그룹은 지난 10년 동안 유통사업분야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 87년초 한일상공이란 부동산개발업체로부터 지금의 아크리스백화점
건물을 사들인후 지방상인과 일반 소비자들을 겨냥한 도매센터를 열었다.
도매센터사업이 시원치 않자 91년 중저가상품을 위주로 한 백화점 영업
방식을 도입, 재래시장의 이미지를 벗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이마저 허사로 돌아가자 지난해 고급백화점인 아크리스백화점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진로종합유통은 이 변신작업에만 3백억원 이상을 쏟아부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균 영업이익을 5%로 치면 6천억원어치를 팔아야 겨우 남길 수 있는
돈을 재단장작업에 일시에 쏟아부은 셈이다.
이같은 시행착오는 유통업에서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유통업이 아니라 "유통업을 하는 사람"이란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국내 유통시장은 현재 변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대형화와 시스템화를 양축으로 한 변혁의 수레바퀴는 날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고 있다.
영세한 동네 구멍가게나 소형 슈퍼마켓은 벌써부터 그 희생양이 되고
있다.
"거대 자본"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것은 강건너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수도권 신도시의 경우 조그만 상가내 점포들의 권리금마저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전근대적인 형태의 재래시장 영세 소매점포는 멀지않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질 판이다.
인구 50만의 신도시 경기 분당에서도 오는 2000년까지 대형 백화점과
할인점 15개 정도가 차례로 문을 열게 된다.
후발 대기업과 기존 유통그룹간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
여기에다 까르푸 마크로 등 세계유수의 유럽계 유통업체들도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백화점 하나 세우는데 1천5백억원, 할인점 하나 짓는 데 5백억원이상이
든다는게 정설이다.
기업들은 적어도 1조원이상의 돈을 이 조그만 베드타운안에 쏟아붓는
셈이다.
"과당경쟁"의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 분명하다.
국가경제 전체로 보면 자원의 낭비도 된다.
"한국의 월마트"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1962년 아칸서스주의 조그마한 시골도시 로저스에 점포를 열면서 시작된
월마트는 33년이 지나서야 연간 매출액 8백90억달러, 순이익 27억달러의
유통대기업으로 클 수 있었다.
외형만으로 보면 국내 랭킹1위 롯데백화점의 20배를 넘는다.
그것도 제조업체에 매장을 내주고 손쉽게 수수료를 챙기는 식이 아니라
상품소싱(Sourcing)과 재고처리 등을 자기 실력으로 해야하는 할인신업태
사업만으로 올린 성적이기에 더욱 무게가 있다.
창업자 샘 월튼은 70대 초반까지만해도 제조업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월마트에 상품을 공급해달라고 간청해야 했었다.
그리고 자기가 손수 상품을 진열대에 쌓아올리면서 상품진열의 기법을
터득했다.
월마트 나름대로 유통사업에서의 노하우를 축적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과 인력을 소나기식으로 쏟아부어도 금방 성장할 수 없는 괴퍅한
특성을 가진 게 바로 유통사업이다.
유통사업 전망이 좋다고 해서 별다른 노하우도 없이 많은 기업들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사업다각화도 좋지만 주력업종 한 곳에 노력을 집중시켜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슬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