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가지면
멀리 지나는 자잘한 바람에도
몸이 흔딜린다.

불을 가지면
어디든 닿아 태우고 싶고
태우다가
타들고 싶어진다.

질끈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앉아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린 자들은
얼마나 쉽게 하산하는가.

불을 가지면
제 발치의 불그림자에 채이며
뒹굴다가
홀로 남게 되는 것을

시집 "하산하는 법"에서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