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우아한 그 부인은 아주 곱고 상냥한 미소로 공박사에게 인사를
한후 밖으로 나간다.

"제가 부르면 그때 들어오시지요.

죄송합니다.

어머니하고 상담할 부분도 많습니다"

공박사도 덩달아 몸을 일으키면서 부인을 위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가
편다.

순간 공박사는 외교관 부인의 몸에 밴 그 정중한 매너에 감탄을 한다.

매일 괴상한 환자들만 상대하다가 이렇게 정상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을
만나면 그녀는 존스홉킨스대학의 그 훌륭한 교양과 지성을 갖춘 의사들을
추억하게 되고 서양사람들, 특히 나이든 신사 숙녀의 더없이 친절하고 교양미
넘치는 대인관계의 매너를 기억해내면서 어느새 한국식으로 변해버린 자기의
거칠어진 매너를 반성하게 된다.

자기는 의사지만 환자에게는 항상 예의바르고 친절한 의사로 살려는 그녀의
좌우명을 리마인드 해본다.

"예의바른 환자가 의사를 가르치는구나"

그녀는 자조에 싸이면서 어느때부턴가 허튼소리만 하는 저질스러운 환자들
사이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는 자기의 교만을 새삼스레 반성한다.

"자, 상담을 하실까요?"

공박사는 에어걸을 한 경력의 소유자답게 인상좋고 반듯한 미모를 가진
제인과 마주앉는다.

"말 못할 만큼 부끄러운 일이란 무엇이지요?"

"저, 이건 미국에서는 그냥 생활의 수단이라고 할수 있어요.

물론 직업의 고상하고 천한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미국서 콜걸을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서울서 비밀살롱의 기생으로 나가요.

요새 그것이 공무원이고 고급 외교관인 파파에게는 흠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못 나가게 해요.

그 문제 때문에...

아니 사실은 제가 다시 약을 살 돈을 만지는 것이 무서워서 어머니가
병원으로 저를 몰고 왔어요.

아버지는 흠이 나면 안 되는 차관급 외교관 이시니까요.

저 때문에 각료가 못 될 수도 있겠지요.

지금 차관이 될 차례예요.

5개 국어를 하는 유능한 분이지요.

저는 불효자식이에요.

약속을 못 지키니까"

"그렇게 이성적이시면서 왜 실수를 하지요?"

"그것이 사실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이 바로 마약환자들의 기막히는 사정이다.

"자, 그럼 제인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신중하게 공박사는 그녀에게 묻는다.

이렇게 지성있는 환자들은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안다.

다만 실천을 못 할 뿐이다.

"저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곳에 가면 저는 누구의 딸이 아니거든요.

내 마음대로 살수 있어요"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헤로인 중독에도 걸렸고, 빨리 치유시킬수 있는 기회도
잃어버렸겠지요.

그런 것을 자유방임의 해독이라고 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