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그룹은 지난해 삼미를 비롯 삼미종합특수강 삼미아틀라스 삼미금속
등 6개 계열사에서 1조5천억원의 매출을 올린 재계 26위(총자산 기준)의
특수강 전문그룹이다.

세계 최고의 특수강업체를 꿈꾸던 삼미의 야망은 무리한 설비투자와
경기불황에 따른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18일 주력기업인 삼미와
삼미종합특수강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목재 해운업으로 성장해온 삼미그룹은 80년대부터 특수강쪽으로 그룹의
힘을 모아왔다.

따라서 이때부터 삼미그룹은 철강경기의 부침과 운명을 같이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미의 역사는 창업주 김두식회장이 지난 54년 무역업체인 (주)삼미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김 전회장은 70년대 초반 창원기계공업단지에 특수강 생산공장인
창원제강소를 건설,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특수강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3공시절엔 방위산업업체로 지정되며 중화학공업 육성책 지원을 받아
고속성장가도를 달렸다.

그결과 삼미는 10층 빌딩이 고작이던 60년대 서울 관철동에 31층짜리
삼일빌딩을 지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미는 1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매출액 순위 17위까지
뛰어올랐던 유망한 그룹이었다.

그러나 기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경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해운 목재 등에 이어 특수강 조선 등은 물론 유통업과 프로야구까지 손을
댄 것이다.

80년 창업회장의 갑작스런 별세와 함께 제2차 오일쇼크가 불어닥치며 삼미
는 도산위기에까지 몰렸다.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로 총수에 오른 창업주의 장남 현철씨는 적자투성
이던 특수강을 주력업종으로 삼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룹의 상징인 삼일빌딩을 비롯 부동산을 매각하고 종전의 주력업종이었던
해운업을 처분했다.

목재사업을 축소하고 여타계열사를 통폐합하는 감량경영도 감행했다.

이러한 자구노력과 함께 8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산업의 호황으로 특수강이
연평균 30~40%씩 신장하며 삼미그룹은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삼미는 85,86년엔 세계적인 특수강 호경기를 맞아 창원공장 증설 및 설비
투자에 3천억원을 투입했다.

89년엔 3억달러 이상을 투자, 캐나다의 특수강회사인 아틀라스와 미국
알텍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로써 삼미는 세계 최대의 특수강그룹이 됐지만 내용적으로는 덩치만 컷지
계속되는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92년 삼미는 또다시 어려운 고비를 맞는다.

북미공장은 인수와 함께 불어닥친 특수강 경기불황으로 4년 연속 적자에
허덕였다.

그룹도 증자자금조달과 누적부채 등으로 인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삼미는 비바백화점 인천만석동부지 방배동사옥 삼미정공 등을 매각하며
부채를 갚아나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김 전회장은 95년말 북미공장의 정상화에 전념하겠다며 그룹경영권을
동생인 현배씨에게 물려주고 미국으로 떠나고 만다.

그러나 신임회장 역시 1조원이 넘는 부채와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취임 1년만에 삼미특수강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창원공장의 봉강 및 강관
설비를 포철에 매각해야 했다.

거듭된 사업확대와 부적절한 설비투자는 결국 삼미그룹의 운명을 법정관리
신청이라는 상황으로 내몰고 말았다.

< 이영훈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