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세종대왕은 역시 조선왕조 5백년의 통치기반을 마련한 현군답게
우찬성 김종서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심왕후의 상을 3년상으로 치르도록
3월26일에 결정한 뒤 밤새 생각해보고 나서는 아무래도 "주자가례"를 좇는
것이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고 있는 조선의 전례에는더 합당하리라
판단한다.

그래서 3월27일에 승정원에 전지를 내려 "부친이 살아 있고 모친이
돌아가면 모친을 위해 기년복 (만 1년동안 입는 상복)을 입는 제도"가
만세의 기준이 되어야 할 듯하니 고례에 밝은 집현전 부교리 하위지에게
옛 제도를 다시 상세히 살펴서 아뢰게 하라고 명령한다.

하위지가 즉각 명령을 받들어 옛 제도를 낱낱이 살펴 3월28일에 그
결과를 아뢰니 세종은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우찬성 김종서 등에게
"부친이 있으면 모친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 제도"는 태종이 법으로
정하였으니 자손된 자는 마땅히 받들어 행해야 하고 또 정자와 주자도
이를 주장하였으니 심왕후의 상도 기년상, 즉 1년상으로 치르도록 하라고
말한다.

정자와 주자 같은 대현들이 경들보다 어질지 못해서 기년복을
주장했겠느냐며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번거롭게 주청하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이에 김종서 등은 세자가 졸곡제사 (죽은지 석달 뒤의 정일이나 해일을
택해 지내는 제사)를 마친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1년을 마친 뒤 천담복
(엷은 옥색 옷)으로써 3년 심상을 치르는 절차만은 거치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세종도 이를 옳게 여겨 받아들이니 부친 생존시에 당한 모친상의 전례가
이에서 확고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 김종서는 국장도감 제조로서 지금이 농사철이라 만약 농민을
산릉역사에 부역시킨다면 때를 놓칠 우려가 있으니 서울의 방패 보충군과
공조와 상의원 장인, 동강과 서강 및 시전 상인, 각사의 종, 개성부의 각
방패군, 경기.충청.강원.황해도 선군, 도첩이 없는 승려로 도첩을 받고자
하는 자 등을 징발해 쓸 것을 계청하여 윤허를 얻어낸다.

세종은 평생의 반려로 금실이 좋아 8대군 2공주를 생산하며 온천행
같은 먼 여행길에도 항상 동행하던 왕비 심씨의 상을 당하여 애통이 뼈에
사무치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4월30일에는 의정부에 글을 내려 백성에게 세금 부과하는
법을 엄정히 세우는 일을 의논해서 아뢰도록 한다.

이에 김종서는 영의정 황희 등과 의논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아뢴다.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이미 조용조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현재 전분
6등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으로 분류하여 토지세를 과세하는 것)과
연분 9등 (풍흉의 정도를 9등으로 나누어 토지세를 과세하는 것)의 제도를
마련하고 있으니 이 제도가 완성되면 토지세인 조법은 바르게 될 것이고,
각 호마다 그 지역의 특산물인 공물을 나누어 내도록 하는 제도는 지금
전제상정소에서 연구 검토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의논이 정해진다면 조법이
또한 바르게 될 것이며, 부역은 매년 10월에 20일을 기준으로 백성들에게
부과하되 풍년과 흉년에 따라 10일을 보태기도 하고 10일을 빼기도 하는
법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용법이 또한 바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왕조 과세제도의 기본 골격이 대강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백성의 과세 부담을 가능한한 덜어주려 했던 세종의 거룩한 뜻을 김종서
등이 잘 받들어 이와 같이 합리적인 세제를 마련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5월17일에 대행왕비의 산릉 역사 현장에서 많은 승군들이 돌을
끌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사실이 세종께 알려지자 세종은 크게 노하여
산릉도감 제조와 낭청들을 모두 잡아들여 문초하려 한다.

국장도감 제조이던 김종서는 산릉의 일이 바쁜데 만약 모두 잡아들이면
일을 못하는 폐단이 생길 터이니 우선 실제 일선에서 일을 지휘하던
영역관과 솔령사령을 잡아다가 문초하는 것이 옳다고 아뢰어 일을
무마한다.

그리고 근년에 계속 흉년이 들어 국가 재정이 넉넉지 못하니 쓸데없는
관원을 줄이도록 하자고 청하여 허락을 받는데 김종서는 그 자리가 비게
되면 보충하지 않는 온건한 감축 방법을 제시한다.

또 6월7일에 세종은 명나라의 상례가 허술하여 황제나 황후가
승하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 온 사신들이 음주식육하며 웃고 떠들고
잔치하고 즐기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던 것을 상기하며 이를 괴이하게
여기고, 부모와 남편의 상을 숨긴 자는 곤장 60대를 치고 귀향 1년에
처한다는 "대명률"의 율문이 이런 명나라 사회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져
지나치게 가벼우니 그런 죄는 곤장 1백대에 3천리 밖으로 귀향보내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의정부에 하문한다.

그러자 김종서 등은 "당률" "지정조격" 등의 법조문을 이끌어 비교하며
그 벌은 너무 과중하니 곤장 1백대에 파직시키고 다시 등용하지 않는 것이
적당하겠다고 대답한다.

이 법은 부모가 돌아간 친상이나 임금 내외가 돌아간 국상에 모두
적용되며 슬퍼하지 않는 죄도 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7월19일에는 소헌왕후 청송 심씨를 대모산 헌릉 서쪽 영릉에
장사지내는 큰일을 치러내게 된다.

김종서는 국장도감 제조로서 5개월 동안 국장치르는 일에 전념하다 이제
겨우 이 일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7월29일에는 병조에서 함길도와 평안도의 변방 장수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부임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청을 올린다.

세종은 이의 가부를 의정부에서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황희는 변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자제나 사위들 및 거느리는 한량중에 무재가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 이들을 거느리고 가봐야 유익할게 없다고 하며 법으로 이를
금하자고 한다.

그리고 우의정 하연과 좌참찬 정분 (?~1453), 우참찬 정갑손도 함길도와
평안도의 변장이 서울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가면 폐단이 많으니 병조에서
아뢴대로 보내지 못하게 하자고 황희의 의견에 동조한다.

이에 김종서가 감연히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변방 장수가 진에 임해서 적과 대치하는데 만약 날래고 믿을 만한
군사와 아들이나 사위 등 친척이 있다면 간성을 의지하는 것 같아서
용기가 저절로 배가될 것입니다.

또 신이 양계의 일을 대강 아는데 변방장수가 집을 하직하고 천리 밖
군진에 부임함에 아들이나 사위 친척 및 서울 군사나 친애하는 선비가
있지 않다면 누구와 더불어 함께 거처하겠습니까.

거느리고 가도록 허가하시면 또한 위무하는 한가지 일일 것입니다.

전례대로 시행하기 바랍니다"

물론 북변의 일은 김종서의 의견을 절대 존중하는 세종이었으니 이
의견이 받아들여졌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한편 9월9일에는 세종 25년 (1443) 2월20일에 일본 통신사 부사가 되어
정사 변효문과 서장관 신숙주와 함께 일본을 다녀왔던 윤인보가 상서하여
대마도와 일본 및 유구에 사신을 보내어 저들을 회유하고 중국과 일본의
배 모양을 본떠 나무닻 대신 쇠닻을 쓰고 띠풀 돛폭대신 쑥돛폭으로
바꾸자는 건의를 한다.

이에 대해 김종서는 영의정 황희 등과 함께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아뢴다.

"구주 등 처에는 병난이 그치지 않으니 사신을 보내기 어렵고 대마도라면
사신을 보낼수 있으나 까닭없이 사신을 보내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또 도적을 사로잡은 것으로 구실을 삼자하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상줄만한 일이 없는데 폐백과 주식을 가지고 간다면 저들이 도리어 의심을
일으킬지 모르니 서서히 후일의 형세를 보아 가며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십시오"

그러자 항상 김종서의 뒤를 밟아 오면서 그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13년 후배인 예조판서 정인지 (1396~1478)가 당장
이렇게 반론을 제기한다.

"고려말에 세섬의 왜놈들이 어지럽히던 재앙은 이루 다 말할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르러서 비로소 귀부 (귀순하여 붙쫓음) 하였는데 이는
비록 나라 세력의 강함이 그들을 굴복시킨 것이지만 여러 대 문물
덕화의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근년에 왜적과 사로잡혀간 본국사람을 수색해 풀어 보냈으니 진실로
고금에 듣기 드문 일입니다.

인보의 말이 사실 일리가 있으니 대내전은 전쟁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서서히 그 형세를 보아가며 사신을 보내는 것이 옳되 종정성은
국상의 상제가 끝난뒤에 인보와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어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상준다면 저들도 또한 세상에 드문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정인지의 김종서에 대한 무모한 경쟁의식을 이미 간파하고 있던 세종은
국상 후에 다시 아뢰라는 간단한 명령으로 이를 일축해 버린다.

사실 정인지는 그 나이 또래로서는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항상 먼저 발탁해 쓰고 있던
것인데 정인지 자신은 늘 대선배인 김종서를 압도하여 제일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항상 초조해 있었던 듯하다.

김종서만 없다면 내가 제일인자가 될수 있는데 하는 조바심이 늘
김종서를 적대적인 감정으로 대하게 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충청감사로 있을때 세종이 김종서의 병든 처에게 어육을 계속
공급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고의로 거역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성으로는 제압할수 없는 경쟁의식이 마치 지옥의 업화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정인지를 김종서 다음대의 인재로 지목하여
김종서 다음으로 임명된 예조판서 정갑손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불과
석달만에 즉각 정인지로 예조판서를 대체시켜 소헌왕후 상사를 치러내게
하니 그 덕에 정인지는 예조판서의 자격으로 6월6일에는 영릉 지문을 지어
바치게 되고, 9월 상순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어 그 해례를 지어 반포하게
되자 그 발문 (책이 이루어지는 경위를 밝히려고 책의 말미에 붙이는 글)을
짓는 영광도 독차지한다.

< "세종실록"권113 세종 28년 9월조 말미에는 예조판서 정인지가
"훈민정음"의 서문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현존
유일본인 국보 70호 "훈민정음"에서 이것이 서문이 아닌 발문인 것을
확인할수 있다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