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의 장례모습이 중국관영TV로 생중계됐다.

언뜻 박정희 전대통령 생각이 났다.

시해에 의한 죽음이 아닌 자연사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아흔이 넘은 나이.

그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20세기 마지막 조종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일까.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1966년 5월 어느날, 천안문광장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등척타도".

이 목소리는 그후 10년간 중국인을 공포와 전율에 떨게 한 문화대혁명의
효시가 되었다.

등척은 인민일보편집장과 북경시위원회 서기를 역임한 엘리트다.

서방세계에까지 잘 알려진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악명 높은 4인방의 이론가인 요문원에 의해 "반당적,반 인적,
반동적"이란 비판을 받게 된다.

모택동의 후광을 입은 요문원의 군중선동적 비판논문은 즉각 중국국민의
감정을 사정없이 부추켰다.

결국 중국사회와 경제발전을 후퇴시킨 피바다의 문혁을 초래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문혁으로 피폐돼 거의 쓰러져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웠다.

손자병법의 화공편에도 "한번 멸망한 나라는 다시 복구할 수 없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라고 적혀 있다.

등의 위대성이 어느정도인지 가늠케하는 대목이다.

등은 평소 중국고대병법을 즐겨 읽었다.

지난 78년 중국잡지 "사회과학전선" 제2호에 무곡이란 필명으로 연재된
"36계"도 그중 하나다.

무곡은 병법의 요체에 대해 간략히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는 법칙성이 있으므로 그 흐름을 제대로 좇아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책략은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한다.

측량할 수 없는 음모가 있을 수 있으니 정황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방략(방법과 책략)의 운용은 사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된다.

열세한 조건하에선 단호히 도망치는걸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 4년간 정책은 일관된 법칙이 없었다.

민심의 소재도 제대로 파악치 못했다.

맞부딪혀 얻어내기 힘들다고 생각될 때 한발 뒤로 물러 서는 지혜도
기르지 못했다.

노동법 안기부법 한보파동 등 전부아니면 전무식의 강경충돌뿐이었다.

병법이란 언뜻 느끼기에 음모와 궤계, 책략이 이어지는 반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나 국가대국가의 일, 즉 외교도 이 범주에서 이루어진다.

황장엽망명, 대만 핵폐기물의 북한반입 등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정세도
병법(전략)의 지혜로 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등을 부도옹이라고 부른다.

쓰러지면 또 일어나는 오뚜기란 뜻이다.

중국경제의 발전이 여러 모순점을 안고 있지만 지난 십여년간 지속된
성장은 역시 그가 짜놓은 틀에 의해 움직였다.

혁명과 점진적 개혁, 시장과 계획경제, 군과 정,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촌간의 복잡한 갈등관계를 개혁의 주창자로서 그가 지닌 독특한 자질을
통해 조정해 왔다.

그는 "리더"란 "승자"의 원칙보다는 "생존"의 길을 더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한 개인이 영원한 승자가 되기 보다는 국가의 생존, 국민의 생존을
택했다는 얘기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을 거듭 숙청해 한을 남겨준 모택동에 복수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권력유지에 역이용했다.

그러면서도 등자신은 결코 명예욕을 추구하지 않았다.

여느 독재자처럼 노골적인 숭배캠페인을 벌인 적도 없다.

최고지도자로 불렸지만 한번도 최고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의 공식 직함 가운데 최고직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다.

비민주적이었을런지는 모르지만 합리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나 중국이 처해 있는 현실을 감안 할때 그의 정책은
중국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동북아의 "오늘"에 사는 우리는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합리적인 생존방법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지도자들의 사심이 들어가지 않은 "공존의 틀"을 짜야한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20세기를 이끈 한 지도자가 죽었다.

그의 장례모습에서 우리는 한국 지도자들의 모습도 읽어보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