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부도 구속 망명 테러..

듣도보도 못한 초대형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한쪽(정치권)에서는 더 벌리라고 아우성이고 다른 쪽(국민)
에선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책임을 통감해도 모자랄 알만한 사람들(정부)은 내탓이 아니라며 발뺌하기
바쁘다.

하지만 이젠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바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경제다.

흥미진진한 얘깃거리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우리경제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굳이 수치를 들먹일 것도 없다.

지난해 외채증가 1위, 경상수지적자 규모와 증가폭은 2위, 성장률하락은
3위, 종합하면 세계에서 꼴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경제의 몰골이다.

좀 어렵다거나 그저 나쁜 정도가 아니다.

경제지표마다 한결같이 "사상최대" 아니면 "사상최악"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경제길래,이런 참담한 수식어가 붙는데도 새삼스럽지가
않다.

우선 기업을 보자.

심하게 얘기하면 자포자기 상태다.

대기업들은 새사업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산업부 조사를 보면 2백대기업의 올 국내투자는 마이너스 2.1%로
나왔다.

4년만의 최저치다.

투자를 못하는 차원을 넘어 요즘은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명단이
다음 부도 대상이라고 나돌 지경이다.

중소기업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넘기기 바쁘다.

서울에서만 하루에 25개사가 부도로 쓰러지는 상황이니 "밤새 별일
없었느냐"는 인사가 어색하지 않다.

그래도 문을 닫는 것보다 공장을 돌리는 편이 손해가 적다는 게 중소기업인
의 한탄이다.

근로자 역시 편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감원이다 명퇴다 하며 몰아붙여 집안에서도 체면을 잃은지 오래다.

가뜩이나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고 실업률은 치솟을게 분명하니 노심초사
할수밖에 없다.

이러니 내친 김에 써버리자는 정신의 황폐화가 그리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은 어떤가.

올해 우리경제의 향방을 가늠할 노동법개정을 책임지겠다고 가져가 놓고도
한보사태의 불똥을 피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납작 엎드려 있다.

총체적 난국에서 건져줄 작품이라며 내놓은게 부유층에 대한 상속증여세
감면이다.

하라는 위기관리는 안하고 인기관리와 보신에만 여념이 없다.

뭔가 해줄 것으로 기대한 적도 없지만, 이쯤되면 차라리 "없는게 낫다"는게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다.

경제관료는 제 몫을 하고 있는가.

아침저녁 다르게 망가져 가는 걸 보면서도 대책이라고 내놓는 건 "잘해
보자"는 호소가 전부다.

한보가 쓰러진지 한달이 지났건만 중소기업들은 아직도 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바로 위기관리능력의 실종이다.

밖을 보자.

오랜만에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를 맞았고, 세계경제성장률도 그 어느때보다
높아진다(4%대)며 제 몫을 찾기에 혈안이다.

진작에 선진국인데도 누가 뒤쫓아 올세라 정부기구를 줄이고 규제를 풀다
못해 국제규범에 걸리지 않는 지원책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다.

기업들은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 우린 어떤가.

어쭙잖은 1만달러 소득을 마치 3만달러 쯤으로 즐기고 있다.

이런 과소비에는 정치인과 관료 기업 근로자가 따로 없다.

"그래도 위기는 아니다"는 아전인수는 이제 착각의 수준을 넘어 마치
아편쟁이처럼 오장육부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인기 따지고 체면 가리고 할때는 이미 지났다.

돈이든 세금이든 규제완화든 간에 국민과 기업들의 경제의욕을 살릴수 있는
길이라면 그것에 국가적 역량을 모두 모아야 한다.

발상의 전환만이 우리 경제를 살려낼 것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 정만호 경제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