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인사시즌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정기임원인사를 통해 수많은 "별"들이 새로
등장했다.

예년보다 적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발표된 대기업그룹의 승진임원수만해도
1천4백~1천5백명선에 이른다.

그러나 이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사잔치는 모두 남성들의
몫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해 싣고있는 주요그룹 승진임원 프로필란의
99%이상이 남성들의 사진으로 메워진다.

적어도 기업사회에서만큼은 우리나라가 여전히 남성절대우위임을
읽게하는 현상이다.

현재 국내 30대그룹의 여성임원수는 오너경영인, 비상임임원을 제외할
경우 20명이 채 안된다.

현대그룹이 5명으로 가장 많고 삼성이 4명, 그밖에 기아 한라 롯데
동부 금호 동양 태평양에 각각 1명정도가 눈에 띨 정도다.

이들 파악된 여성임원중에는 그나마 오너와의 친인척관계에 있는
여성임원들이 5명이다.

나머지 임원들도 의료원 복지후생 문화센터등 메이저부서가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임원발탁의 배경이야 어찌됐건 그들의 역량은 남성 임원에
못지않다.

출신과 경력에 관계없이 이들은 임원의 자질을 인정받아 그자리에
올랐고 현업부서에서 받는 평가 또한 한결같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들어서는 전문기술직에서 성장한 실력파 여성임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연 여성임원에 대한 전문인으로의 인식도 상당히 높아지는 추세다.

물론 이들이 임원이 되기까지 밟아온 과정이 결코 순탄할수만은 없었을
터이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오히려 더 치열한 경쟁과 불신의 벽을 넘지
않으면 안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강인하다.

일에 대한 욕심과 열정 또한 남자들 못지않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정신무장을 해왔다"(삼성데이타시스템
주혜경이사)"

스스로 여자란 생각을 잊었다"(기아중공업 조성옥이사) 대부분의
여성임원들은 또 뛰어난 업무실적과 화려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삼성생명 임춘자이사는 영업실적 최고자에게 주는 "여왕"칭호를
2년연속 받고 최우수 영업소장을 7번 차지한 보험업계의 신화적 인물이다.

삼성데이타시스템 주이사는 훈장마을시리즈개발로 유명하며 한라그룹
이은정상무는 영어 불어 일어에 능통, 회장의 영문연설원고를 도맡아
처리하는 실력파다.

그렇다면 이처럼 "만능여성"만이 임원에 발탁될 수 있는 걸까.

남녀고용평등이 공공연히 주장되는 현 시점에서 여성임원은 아직도
왜이리 희소할까.

인사관계자들은 그 이유로 우선 여성의 수적 열세를 꼽는다.

"임원뿐 아니라 대리급 이상 중간관리직들의 숫자도 전체의 1%가 채
안된다"(두산그룹 기조실 김진이사)

대졸여성사원을 그룹공채로 뽑기 시작한지 20년이 넘었지만 결혼후 퇴사,
실무직미배치등 인력활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임원으로 승진할 만한
중간간부층이 형성돼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물론 이같은 수적열세의 배경에는 여성스스로의 프로의식부족과 기업의
여성인력지원이 다같이 미흡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혼자 크기는 어려운 법이다.

여성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여성이라고 바운더리를 좁히면 좌절하고
무능력해진다.

오히려 큰일을 맡겨줄 때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이 배가되더라"고
고백한다.

이는 곧 "기업의 여성키우기"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회사가 반쯤 도박하는 심정으로 먼저 나서서 여직원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대폭 이양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이제 여직원들은 더이상 사무실의 꽃이 아니다.

멀지않은 장래 우리 기업사회에서도 여성전문경영인들이 남성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경쟁하는 시대가 올성싶다.

< 권수경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