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드라마의 고무줄같은 탄력성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괜찮다 싶은 부분은 최대한 길게 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줄이거나 가차없이 잘라 버린다.

처음 발표했거나 알려졌던 대로 내용이 전개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드라마의 탄력성이 이처럼 좋아진(?) 이유는 사전제작이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 탓도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시청률지상주의" 때문이다.

시청률이 시원찮다 싶으면 "조기종영"되니 작가와 연출자 배우 가릴 것 없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요소를 집어 넣으려고 안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이야기전개에 무리가 따르고 극의 흐름상 불필요한 선정적,
폭력적 장면이 끼어든다.

지난해 "조기종영방송국"이라는 오명을 얻은 MBC는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대하사극 "미망"(극본 임충,연출 소원영)이 초반에 한자리수 시청률을 기록
하며 부진의 늪을 헤맬 때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조기종영시키자니 거센 비판이 두렵고 작품의 완성도도 아까웠을 것이다.

MBC가 "작품성이 좋으면 절대로 조기종영시키지 않는다"며 내세웠던
드라마도 "미망"이었다.

사실 탄탄한 이야기구성, 장대한 스케일, 깔끔한 영상과 음악, 최불암
정혜선 김수미 홍리나 특히 아역배우 권해광의 빛나는 연기등이 어우러지며
사극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으나 시청자들의 외면속에 주목받지 못했다.

드라마는 아역에서 성인연기자들로 교체되면서 달라졌다.

작가 임씨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것같다.

원작에 충실했던 1부와 달리 중반에 들어서면서 마음대로 뜯어 고치며
각색의 한계를 넘어섰다.

머릿방아씨로 나오는 홍리나가 주목받자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대본을
수정, 시어머니(홍씨)와 머릿방아씨의 갈등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태임과 종상, 승재가 펼치는 흥미진진한 삼각관계는 멜로물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단번에 끌어들였다.

서해랑과 하야시파가 벌이는 일전은 영화 "대부" 시리즈를 연상케 했다.

결과는 대성공.

완성도를 떠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시청률이 3배 가까이 뛴 것.

여기에는 다소 벅차 보이지만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채시라의 열연과
마치 제옷을 입은 듯한 전광렬, 김상중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한몫했다.

하지만 개성상인 전처만일가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우리식 자본주의
의 싹을 찾고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쳐 살다간 민초들의 모습을 조명
하겠다는 애초의 의도는 희석된 느낌이다.

앞으로도 하야시파와 서해랑의 다툼, 태임 종상 승재의 뻔한 삼각관계가
극의 중심축을 이룰 것으로 보여 이미 많이 훼손된 대하사극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안태형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