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파일] 서울시스템 연구원 심우섭씨 .. '청학동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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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은 있게 마련이다.
이 때를 만나면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해야 한다고들 한다.
옛사람들은 이에대해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고 답하고 있다.
전자글꼴 개발업체인 서울시스템의 심우섭연구원(27).
주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혜안"을 가진 청년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첫번째 인생의 전환점에서 보여준 변신의 모습이 놀랍기 때문이다.
심연구원은 현재 서울시스템에서 "가장 대접받는 몸"이다.
국내에서 몇 안되는 한자 글꼴 개발 전문가(폰트 디자이너)일 뿐 아니라
손꼽히는 고전번역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원전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는 일에서부터 여기에 맞는 새 글꼴을 컴퓨
터로 디자인하는 일까지 서울시스템의 일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게 없을
정도.
내년에는 새 글꼴로 만든 원전 조선왕조실록 CD롬타이틀도 내놓을 예정
이다.
이 회사의 이웅근사장은 "심연구원은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몇년전만해도 심씨는 지리산에서 나무를 하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사서삼경과 춘추를 공부하기 위해 스승의 뒷바라지(학체라고 함)를 하던
숫기없고 성실한 문하생이었다.
"빨래 밥 나무는 물론이고 아침이면 스승의 세숫물도 준비하며 공부했죠"
심씨는 전국에 안가본 곳이 없다.
충남부여로부터 시작해 전남보성, 구례, 지리산 청학동, 강원도 두메산골
까지 배울만한 스승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찾았다.
1~2년씩 스승의 수발을 해 가며 10년 가까이를 한문학에만 정진한 것.
그러던 그에게 첫번째 전환기가 왔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성년으로서 상투를 틀어야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한번 틀어올린 상투는 풀기가 쉽지 않은게 관습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온 동료는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이 문제를 적지 않게 고민한 후 그는 과감히 떠꺼머리를 자르고 서울행을
택했다.
심씨가족과 그의 지인들은 총명하고 박학한 그가 사멸돼가는 한문학의
명맥을 잇기를 바라며 상경길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미련없이" 변신의 길을 택했다.
그는 우선 교육과정을 마스터했다.
상경한 지 2년만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검정고시를 패스한 것.
동시에 문체부산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3년간 공부한 후 3명을 뽑는 국역
자선발시험(고전 해독능력테스트)에서도 "장원급제", 주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심씨는 95년 지인의 소개로 서울시스템에 입사했다.
심연구원은 이제 아침에 사서오경대신 노트북컴퓨터를 둘러멘다.
노트북도, 복잡한 출근길도, 컴퓨터앞에서 하루종일 작업하는 것도 아직
몸에 익숙지 않다.
그러나 서울생활이 즐겁기만 하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접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죠"
심연구원은 "앞으로 해야할 일이 남은 인생만큼이나 많다"고 한다.
우선 인력과 투자비가 모자라 손도 못대고 있는 수많은 고전들을 일반인
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 하는게 그것이다.
대학입학은 두번째다.
기회가 된다면 고전분야의 정보화를 위해 외국에 나가 이 분야도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다.
인생에 세번의 전환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두번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걱정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고 한다.
항상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노력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심우섭씨의 다음 변신 모습이 기대된다.
[ 글 박수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1일자).
이 때를 만나면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해야 한다고들 한다.
옛사람들은 이에대해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고 답하고 있다.
전자글꼴 개발업체인 서울시스템의 심우섭연구원(27).
주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혜안"을 가진 청년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첫번째 인생의 전환점에서 보여준 변신의 모습이 놀랍기 때문이다.
심연구원은 현재 서울시스템에서 "가장 대접받는 몸"이다.
국내에서 몇 안되는 한자 글꼴 개발 전문가(폰트 디자이너)일 뿐 아니라
손꼽히는 고전번역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원전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는 일에서부터 여기에 맞는 새 글꼴을 컴퓨
터로 디자인하는 일까지 서울시스템의 일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게 없을
정도.
내년에는 새 글꼴로 만든 원전 조선왕조실록 CD롬타이틀도 내놓을 예정
이다.
이 회사의 이웅근사장은 "심연구원은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몇년전만해도 심씨는 지리산에서 나무를 하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사서삼경과 춘추를 공부하기 위해 스승의 뒷바라지(학체라고 함)를 하던
숫기없고 성실한 문하생이었다.
"빨래 밥 나무는 물론이고 아침이면 스승의 세숫물도 준비하며 공부했죠"
심씨는 전국에 안가본 곳이 없다.
충남부여로부터 시작해 전남보성, 구례, 지리산 청학동, 강원도 두메산골
까지 배울만한 스승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찾았다.
1~2년씩 스승의 수발을 해 가며 10년 가까이를 한문학에만 정진한 것.
그러던 그에게 첫번째 전환기가 왔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성년으로서 상투를 틀어야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한번 틀어올린 상투는 풀기가 쉽지 않은게 관습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온 동료는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이 문제를 적지 않게 고민한 후 그는 과감히 떠꺼머리를 자르고 서울행을
택했다.
심씨가족과 그의 지인들은 총명하고 박학한 그가 사멸돼가는 한문학의
명맥을 잇기를 바라며 상경길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미련없이" 변신의 길을 택했다.
그는 우선 교육과정을 마스터했다.
상경한 지 2년만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검정고시를 패스한 것.
동시에 문체부산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3년간 공부한 후 3명을 뽑는 국역
자선발시험(고전 해독능력테스트)에서도 "장원급제", 주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심씨는 95년 지인의 소개로 서울시스템에 입사했다.
심연구원은 이제 아침에 사서오경대신 노트북컴퓨터를 둘러멘다.
노트북도, 복잡한 출근길도, 컴퓨터앞에서 하루종일 작업하는 것도 아직
몸에 익숙지 않다.
그러나 서울생활이 즐겁기만 하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접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죠"
심연구원은 "앞으로 해야할 일이 남은 인생만큼이나 많다"고 한다.
우선 인력과 투자비가 모자라 손도 못대고 있는 수많은 고전들을 일반인
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 하는게 그것이다.
대학입학은 두번째다.
기회가 된다면 고전분야의 정보화를 위해 외국에 나가 이 분야도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다.
인생에 세번의 전환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두번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걱정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고 한다.
항상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노력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심우섭씨의 다음 변신 모습이 기대된다.
[ 글 박수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