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나라가 1997년이 될때까지도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이 지구가 이렇게 복잡해지고 자동차들로 앞뒤가 꽉꽉
막혀서 숨도 못쉬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물론 그때는 미지의 이름 없는 땅이던 강남이니 분당이니 일산같은
그런 곳들이 생겨나리라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강북에서만 40년을 살아온 나는 아직도 강남이 외국보다
더 외국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어릴적 나는 안국동 우체국이 있는 길목을 지나 2km정도를 매일 걸어서
학교에 갔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우체국에 들러 암스트롱의 달 착륙우표를
사기도 하고 박정희 대통령 취임우표를 사기도 했다.

그때 사모았던 제6대 대통령 취임기념 우표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우리 세대의 대학 시절은 온통 박정희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시위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들여다보는 우표 속의 그의 젊은 얼굴은 마치 죽은
아버지를 바라보듯 그리움을 일게한다.

무엇이 더 나아지고 더 나빠졌을까.

사람들은 건강에 가장 나쁜 것은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곧 스트레스와의 대화이며 동침일지
모른다.

문득 TV에서 본, 열다섯살에 고향을 떠나 정신대로 끌려가 칠십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한 할머니들의 떠오른다.

너무 어릴적에 떠나 한국말 발음이 정확치 않은 할머니의 절규-그런
모습을 볼 때 스트레스란 얼마나 화려한 수식어인가? 중국에서도 배척받고
한국에도 올 수 없었던,아무데도 디딜 곳 없는 사람들의 슬픔을 우리는
모른다.

게다가 무엇인가 돕기는 커녕 조선족 동포들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어둡고 답답해진다.

정말 그들에게 끝없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