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제조업의 "해외탈출"이 러시를 이루었다.

또 산업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이를 둘러싼 정부와
기업간의 시각차와 논란이 가열된 한해였다.

신발 봉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의 해외진출은 이미 오랜 일이다.

하지만 올들어서는 전자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우리나라가 비교 우위에
있는 업종들마저 물밀듯이 해외로 몰려나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9월까지의 해외직접투자 허가금액은
41억5천만달러.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53.8%나 늘었다.

반면 12~15%에 달하던 기업들의 국내 투자 증가율은 올들어 4~7%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런 현상이 한계기업의 해외이전에 국한됐다면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올해 기업 해외투자의 상당부분이 "도피성 기업이민"이었다는 점이
문제의 포인트다.

더욱이 반도체 자동차처럼 우리의 주력 기간산업까지 경쟁적으로 뛰쳐
나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현대전자는 13억달러를 들여 미국 오리건주 유진에 한달에 8인치 웨이퍼
3만장을 가공할 수 있는 반도체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도 텍사스주 오스틴에 같은 규모의 반도체공장 건설을 진행중이다.

LG전자는 2002년까지 26억달러를 투자해 영국 웨일즈지역에 종합전자
단지를 조성키로 했다.

자동차업계도 마찬가지다.

대우자동차가 루마니아 폴란드 우즈베크 체코 등에 대규모 추가투자에
나서고 있고 현대자동차는 최근 11억달러가 투입될 인도공장의 착공에
들어갔다.

심지어 철강업체도 중국 베트남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가운데 주요 대기업그룹들은 경쟁적으로 국내 또는 해외현지에서
중장기 해외투자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해외탈출 러시가 이어지자 마침내 정부는 우려의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용과 우리경제의 장래를 생각할 때 기업의 지나친 해외탈출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이석채경제수석의 경우 취임 열흘만에 10대그룹 기조실장들을
불러놓고 이같은 우려를 공식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주문에 대해 기업의 반응은 냉담했다.

"해외투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강병호 (주)대우 사장)

"국내 기업환경이 외국의 평균 수준만 되면 나가라고 몰아대도 안나가고
버티겠다"(S그룹 기조실장)는 등의 반응이 대부분 이었다.

다시말해 "고비용-저효율"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는 국내에서
버티려고 하다가는 끝내 고사되고 말 것이 뻔한데 해외라도 나가서
기업활동을 영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기업들의 한결같은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런 "탈한국"현상이 올해만으로 그칠 것 같지가
않다는데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내놓은 "97트렌드20"을 통해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단기간 개선이 어려운 만큼 기업들의 해외투자는 더욱 가속화.대형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주요그룹들의 해외거점과 해외인력은 2000년까지 지금보다 2배이상으로
늘어나고 5대그룹의 해외투자는 향후 10년간 총 7백억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업하기 좋은 환경,다시말해 고비용 구조의 개선과 규제의 해소만이
기업의 "엑소더스"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책"(서상록 중소기업연구원
부원장)이라는 지적이 어느 때보다 피부에 깊숙히 와닿는 한해였다.

< 김정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