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

전직 국가원수 3명이 모두 법정에 출두하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색다른
경험을 겪고 있다.

우리는 이 재판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민주국가의 시민이 됐다는
자긍심을 느끼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암울했던 역사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 증오심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인적인
연민의 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느낌이 어떻든 간에 다시는 이땅에 12.12와 5.18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러한 공감대는 곧 12.12와 5.18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진실이 제대로 파헤쳐져야 다시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노 전대통령을 구속하고 법정에 세운 이유가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는 문민정부의 논리는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이같은 역사적 재판에 최규하전대통령은 14일 증언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통령의 국정수행중 행위를 소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후임
대통령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는게 증언거부의 이유다.

그는 또 "냉엄한 안보현실하에서 대국적으로 국익에 손상을 줄까 두렵다"
며 국익을 내세웠다.

일반 국민과 역사보다는 후임대통령을 걱정하는 그의 인식과 "대국적인
국익"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동안 역사적 진실규명을 위해 법정에 출두했던 수많은
증인들은 모두 국익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또 그에게 증언을 요구하는 일반여론 역시 국익과 국가의 내일을 외면한
무책임한 주장이란 말인가.

개인적인 주관이나 생활신조를 내세워 진실규명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포기하는 최전대통령의 증언거부에 일종의 분노를 느낀다.

최완수 < 정치부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