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에 나도는 얘기다.

프랑스계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국내굴지의 전자업체인 A사 영업담당자에게
팩스를 보냈다.

"당신회사의 가전제품 가격을 20% 내려 공급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본 A사 영업담당자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포가 중동점 하나밖에 없고 자사제품판매량도 그다지 많지 않은
까르푸가 명령하듯이 제품공급가격을 내리라고 요청한 것이 가당치도
않게 느껴졌다.

팩스내용을 무시하고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보름후 까르푸에서 다시 팩스가 들어왔다.

"만약 당신회사의 가전제품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 매장 진열대에서
당신회사 제품들을 모두 내리겠소"이를 받아든 영업담당자는 바짝 긴장했다.

점포 하나밖에 없는 회사가 무슨 배짱으로 국내최고브랜드임를 자부하는
회사의 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까르푸에 대해 이곳저곳에 문의했다.

까르푸는 지난해 매출액 22조원을 기록한 유럽지역 최대의 소매유통업체
였다.

전세계에서 까르푸가 판매하는 A사 가전제품 매출액도 상당했다.

A사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가격체제를 붕괴시킬수 있는 "20%"인하는 쉽게 받아들일수 없는
요구조건이다.

A사는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가격을 대폭 내리라는 요구때문에 까르푸와 거래를 계속해야할지
고민하는 업체가 늘어나고있다"(E마트관계자)는 얘기가 곳곳에서
나오고있다.

"까르푸팩스"설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라는게 유통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까르푸 마크로등 외국유통업체들은 전세계시장에서 웬만한 국내
대기업그룹 매출액보다 많은 판매실적을 갖고있다.

이들 다국적유통기업은 한국제품의 수출가격과 원가구조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다.

이들이 수출가격정보를 근거로 납품가격을 내릴 것을 요구할 경우
국내시장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국내판매가격이 수출가격보다 높은 "내외가격차"시장구조가 일시에
무너질수 있다.

수출지향의 사업구조를 갖고있는 대기업일수록 다국적유통기업의 요구를
무시할수 없기 때문이다.

한곳에서 무너진 가격은 도미노처럼 번진다.

국내제조업체가 다국적유통기업에 수출가격으로 낮춰 납품하면 경쟁관계에
있는 국내유통업체들도 같은 가격으로 납품가를 맞춰줄 것을 요구할게
뻔하다.

"국내 제조업체들이 결국 유통업체에 가격결정권을 빼앗길 것"
(신세계백화점 이동훈상무)이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다국적유통기업들은 최근까지 국내제조업체에 납품가격을 무리하게
낮추도록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까르푸 마크로등은 아직까지 점포가 한개밖에 없는데다 진출 첫해
"무리한"영업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지난7월 중동점 개점에 앞서 한국까르푸 베르나르 엘루아사장은
"국내시장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가격이 낮고 품질이
우수한 PB(자체상표)상품 판매를 자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까르푸 중동점의 판매가격을 다른 업체에 맞추는 수준에서 결정한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네덜란드계 유통업체인 마크로 역시 유통시장개방 원년인 올해 무리한
요구를 자제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있다.

까르푸는 6일과 7일 일산점과 대전 둔산점을 잇따라 개점한다.

까르푸의 2,3호점 개점을 계기로 외국소매유통업체들이 국내시장에서
가격결정과 제품기획등을 주도해나가는 현상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까르푸는 일산신도시에 지상7층 지하1층 규모에 연면적 1만4,260평,
매장면적 3,860평의 대형점포를 연다.

대전 둔산점도 지상7층 지하1층 연면적 1만4,540평에 3,980평의
매장을 갖고있다.

까르푸는 지난7월 중동점을 개점한지 6개월만에 국내에서 3개점포를
갖게됐다.

지난1월 인천점을 개점한 마크로 역시 올해말 일산점을,내년상반기중
분당점을 연다.

국내에 진출한 두 다국적유통기업이 매장개설을 본격화하면서 국내시장을
공략할수 있는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게된 것이다.

까르푸는 내년부터 PB상품을 들여다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가전제품인 "퍼스트라인"과 의류제품인 "텍스"상표를 특허청에 출원했다.

PB상품을 언제든지 내놓을수 있는 준비를 끝낸 셈이다.

또 내년부터 본격적인 가격경쟁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있다.

여기에다 세계최대의 소매유통업체인 월마트가 국내컨설팅업체를
통해 부지를 매입, 국내에 단독으로 진출한다는 소문마저 나돌고있다.

북미지역에 근거지를 둔 월마트와 유럽최대의 유통업체 까르푸가
한국시장에서 정면으로 맞붙게될 경우 국내유통시장은 국제적인"전쟁터"로
변하게된다.

유통업체가 상품시장을 주도하는 "유통업계우위시대"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올 수도 있다.

국내제조업체와 유통업체들이 어떤 대응책을 마련할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 현승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