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애국운동의 주류는 문무로 몸을 던져 일제와 정면
대결하던 전열사들이었다.

반면에 민족의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교육과 문화유산 보호에 신명을
바친 사람들도 있다.

그 대표 주자가 간송 전형필 (1906~62)이었다.

간송의 족적은 특히 일본의 골동품 대수집가들과 당당히 맞서 일급의
한국문화유산들이 국토밖으로 유출되어 사라지는 것을 막는데 수훈을
세운데서 우뚝히 드러난다.

1935년 고려상감청자를 대표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68호)을
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2만원에 사들이고 36년에는 경성미술구락부
전시경매에서 "예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 (보물241호)을
1만4,580원으로 일본인 대수장가들을 물리치고 낙찰받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당시 고등관이었던 군수의 월급가 70원이었던 것으로 볼 때 엄청난
거금을 주고 사들인 문화재들이 아닐수 없다.

간송의 한국문화수집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37년 영국인 변호사로서 동경에 살면서 수십년동안 고려청자를
모아온 존 개스비로부터 그의 수장품을 공주에 있는 5천석지기 전답을
팔아 사오기도 했다.

간송은 국내의 문화재 소장자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싼값을
부르면 그 자신이 판단한 몇배의 값을 얹어 주었다.

골동상은 물론 수장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찾거나 정보를 제공해
주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들인 것이 "훈민정읍원본 (국보), 정선의 대표작이라
할수있는 겸 진경산수화첩 "해악전신첩", 심사정의 "촉잔도권" 등이다.

간송에게는 남달리 엄청나게 많은 재력이 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10만석지기의 유산이었다.

그는 이것을 일신의 영달이나 안락한 생활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오직 민족문화유산 보굴에 투철했다.

1945년 광복이 된뒤에는 문화재 수집을 거의 중단한데서 그의 투철한
의지는 드러난다.

광복된 조국에서는 어느 누가 문화재를 소장한다하더라도 문제될게
없었기 때문이다.

간송의 그러한 의식은 와세다대학 법과 재학시절에 휘문고보의 은사인
미술교사 춘곡 고희동의 소개로 문화재 수집보호의 선각자였던 위창
오세창을 알게 되면서 싹텄다.

민족문화유산 보호의 선각실천자인 간송이 정부에 의해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업적이 집적된 간송미술관에서 특별추모전이
열리는 것을 비롯 갖가지 행사가 펼쳐진다.

현세적 권세와 물질적 영화에만 급급한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간송이
남겨준 교훈은 너무나 크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