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93년 9월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은 KT 근방 이마빌딩에 자리를 잡고
업무 개시 4개월만에 "사용자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관리단은 연구 개발 방향을 바로 잡은 다음 자문 교수단과 CDMA 기본
규격인 IS-95에 관련한 조사 연구를 해 나갔다.

업체들과는 여러 차례의 협의를 거쳐 사용자 요구 사항을 보완함으로써
정식 규격으로 발전시켰다.

업체들은 사업의 중요성이 워낙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맨 탓인지 관리단의 요구에 잘 응해 주었다.

관리단 안에 단말기 연구실을 차려 놓고 국내외 업체들이 만든 시제품을
하나하나 시험 분석 평가하는 등 관리단 자체가 나서서 업체를 지원하자
오랜만에 활기찬 사업 분위기가 조성됐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주도업체들이 과거 TDX 개발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어 나의 관리 철학을 잘 알아 힘은 들었지만 갈등은 없었다.

나는 업체들에 소화할 수 없는 기술의 도입은 예속이고, 시장없는 개발은
낭패이며, 관리없는 사업은 실패라는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

이러다 보니 사업 목표도 분명해지고 그들을 훼방하던 걸림돌이 없어지자
운용자(발주자)와 개발자(납품자)간에 서로 신뢰하고 독려하는 사업 환경이
조성됐다.

이렇게 되자 상품을 발주하고 납품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초월해서
CDMA의 젊은이들은 공동의 성취를 위해 너나없이 분발하기 시작했다.

94년 7월 관리단은 약 1천여개에 달하는 상용 시험 항목을 업체에 통보했다.

같은해 8월 상용 시험전 예비 시험을 실시한 결과 삼성 현대 LGIC가 차례로
통과했다.

94년 9월말에 가장 먼저 예비 시험에 통과한 삼성이 KMT의 장안동 연구소에
상용 시험기를 가동한데 이어 11월 중순에는 LGIC와 현대도 잇달아 상용
시험기를 가동하는 등 가시적 변화가 나타나자 우리는 꼭 해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모두 하게 됐다.

사실 CDMA사업은 이미 선진국에 있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용화
되지 않은 원천 기술(CDMA)을 도입해 최신의 디지털 셀룰러 전화를 개발하는
것이므로 엄청난 연구의 모험과 개발의 고통이 뒤따라야 했다.

여기에 80년대에 축적된 교환기 기술(TDX)과 그때 훈련된 기술자들이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95년 1월 LGIC의 시스템이 1백여 항목에 걸친 상용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CDMA 셀룰러 전화의 상용화에 확신을 갖게 됐다.

삼성과 현대도 2월과 3월에 잇달아 상용 시험에 통과했다.

세계 최초의 상용화를 목표로 CDMA 시스템 하드웨어의 개량 및 보완,
소프트웨어의 향상 및 디버깅에 우리 젊은 과학 기술자들은 주말도 명절도
없이 가정생활까지 희생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CDMA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냉소와 시샘을 와신상담의 각오로 견디며
그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샜던 것이다.

그때 그 모든 어려움을 감내해준 젊은이들에게 진 마음의 빚은 아마 내
평생을 두고 갚아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시스템은 완성됐지만 기존의 아날로그망에 연동
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에서 CDMA 시스템의 운용주파수를 뽑아 낸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 부담이었다.

또 오랫동안 남이 개발한 아날로그 시스템을 운용만 해 왔기 때문에 독자
개발한 디지털 시스템을 운용하는 데에는 새로운 노하우가 필요했다.

CDMA의 가입자 수용 용량도 확신을 갖기에는 더 많은 시험 평가를 해야
했다.

사실 원천 기술을 개발한 미국의 업체들조차 상용화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시험 평가와 시범인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무기 체계,공중 통신망 등 고도의 신뢰성과 안정성이 요구되는
시스템을 개발해온 사람으로서 셀룰러 시스템도 상용화 초기에는 개발
단계에 못지 않은 연구가 필요하며, 고객에게 만족을 주기까지는 제법
시일이 걸린다는 사실을 개발자와 운용자에게 일러주곤 하였다.

물론 나는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95년1월부터 상용 시험에 들어간 CDMA시스템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입자
수용 용량, 소프터, 소프트 및 하드 핸드오프, 음성 압축과 음질, 최적 셀
반경 등 수없이 많은 과제를 관리단에 부여했다.

KMT 네트워크 센터(장안동)에 설치한 시스템 시험기(STP), 기지국 시험
평가차량, 업체의 개발실등 엄청난 규모의 네트워크와 개발 및 지원 인력이
과제 수행에 동원됐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머리와 손으로 미지의 기술에 도전
하여 마침내 이루어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다.

특히 용량의 한계는 아날로그방식의 10배에 달하는 것을 여러 차례의 시험
평가에서 입증했으며, 음질도 두차례의 내부 공개 시험과 여러 차례에 걸친
외부 시연을 통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게다가 외국의 경쟁업체들도 한국이 이렇게 빨리 상용화를 이룰 줄
몰랐다고 어리둥절해 할만큼 관리단은 사업에 대한 정보 보안에도 신경을
썼다.

이로 인해 과정마다의 성과를 충분히 세간에 알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의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국책 사업에 대한 정보 보안에 더
우선을 둘 수밖에 없었던 관리단의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오히려 안쓰러웠던 것은 실제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떠들고 다닌 사람들은 사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95년3월 KMT사장으로 부임하면서 CDMA사업을 전사 총동원체제로 추진했다.

95년5월에는 8백여 항목의 현장 운용 시험을 끝내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에서 시범 운용에 들어갔으며, 9월과 10월에 LGIC는 상용 교환기 1호기와
2호기의 설치를 완료했다.

또 10월부터는 채널 카드를 보완하고 안정화시켜 호(호) 완료율을 대폭
개선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연구소의 ASIC 국산화도 부진하고,상용화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외국에서 도입한 단말기에 문제가 생겼다.

이같은 위기에 처해서 KMT와 외국 업체의 엔지니어들은 95년말부터 96년초
까지 휴가를 포기하고 연구에 몰두, 소프트웨어의 향상 및 디버깅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는 인천~부천 지역에서 세계 최초의 디지털 이동 전화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때 PCS의 무선 접속 방식을 놓고 정보 통신 분야가 표류의 멀미를 앓던
때가 있었다.

상용 실적이 없는 CDMA 방식보다 상용화된 GSM(TDMA)을 표준화하자는 일부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미국의 PCS업계도 한때 유럽의 GSM을 평가했지만 일부 영세업자를 빼고
미국의 PCS업계를 대표하는 지역 전환 회사 계열과 비지역 전화 회사 계열
모두 CDMA 방식으로 기울고 있었다.

최근에 미국의 AT&T가 TDMA를 채택했다고 하여 눈길을 끌고 있지만 미국
시장 전체를 좌우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우리가 TDMA기술을 획득하려고 했을 때 아무도 기술을 공여해 주지
않아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셀룰러용 CDMA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한 시점에서 GSM 기술을 주겠다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신차려 살펴야 한다.

공예품이나 골동품은 오래될수록 문화재로서 값이 올라가지만 기술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곧 쇠퇴한다.

CDMA는 셀룰러 전화와 PCS뿐만 아니라 미래의 공중 육상 이동통신시스템
(FPLMTS)에 쓰여질 기술이다.

지금 우리는 이동체통신 분야에서 도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
했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듯 한 나라의 정보통신시스템과 서비스도 스스로
씨를 뿌려 가꾸지 않고 며칠이면 시드는 꽃꽂이처럼 남의 기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돌밭이라도 갈고 씨를 뿌려 땀흘려 가꾸는 농자의 고통을 겪고 터득한
기술이라야 국민을 편하게 하고 나라살림을 부강하게 만든다.

진정한 세계화란 남의 것도 유익한 것은 받아들이되 우리의 혼과 얼이
담긴 기술 상품 서비스를 제값을 받고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가 CDMA의 상용서비스에 들어가자 외국 업체들이 각자의 단말기를
들고 모여든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KMT의 CDMA 상용서비스는 96년1월1일 세계 최초로 인천 부천 지역에서
시작된데 이어 수도권 경기 대전.충남 대구.경북 부산.경남 광주.전남
전주.전북 춘천.원주 강릉.강원 제주시.서귀포 제주 지역 등 전국 70개
도시에 확대됐다.

가입자도 30만 명을 훨씬 넘었다.

게다가 경제적 효과도 커 96년에 구매한 1천여 기지국,9개 교환기 등
6천여억원어치의 물량과 97년말까지 구매할 물량을 합치면 CDMA시스템의
자체공급으로 무려 1조5천억원의 수입 대체를 한 것이다.

여기에 신세기통신의 구매 물량과 단말기 물량을 고려하면 몇조원이 될
것이다.

사실 운용 및 유지.정비의 입장에서 본다면 업체별 시스템 수는 적을수록
좋다.

하지만 우리는 업체들의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LGIC, 삼성 및 현대의
시스템을 모두 구매하고 있다.

이점 역시 고급 기술 인력의 확보, 중소 기업의 육성, 고용 창출 등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는 길임을 누구나 한번쯤 되새겼으면 한다.

마치 프로펠러 항공기로 제공하던 여객 서비스가 결국에는 제트 항공기로
발전하는 것처럼 셀룰러 전화 서비스가 플림스로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미 CDMA로 디지털 셀룰러 서비스를 실현한 KMT는 PCS의 기반이 되는
"기가셀(Gigacell)"을 시범하고 있다.

만년필 전화 하나에서 제철소 초고속 정보통신망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상의
기술력을 가진 나라의 저력이란 모두 작은 바탕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기술의 역사적 연속성 위에서 그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적 우수성을 발휘
하고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2일자).